[데스크칼럼] 기업은행 10층에 내리지 못한 ‘윤종원 낙하산’


[아이뉴스24 민병무 기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낙하산(落下傘)’을 찾아봤다. ‘비행 중인 항공기 따위에서 사람이나 물건을 안전하게 땅 위에 내리도록 하는 데 쓰는 기구. 명주나 나일론 따위의 넓은 천에 여러 개의 줄이 달려 있고, 땅에 내릴 때는 반구형의 우산 모양으로 펼쳐져 공기 저항을 크게 함으로써 떨어지는 속도를 늦춘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떨어지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지만, 지상에 무사하게 세이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존재다.

어린 시절 낙하산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1977년에 개봉한 영화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 몽고메리 연합군의 최대 실패 작전인 ‘마켓 가든’을 다룬 작품이다. 단연 눈길을 사로잡은 장면은 독일 국경과 연결되는 다리를 차지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고공낙하 신(scene)이다. 눈송이가 펄펄 날리는 것처럼 하늘에서 빼곡하게 내리는 낙하산 모습에 넋이 빠졌다. 낙하산으로 가득 수놓은 영화 포스터가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우산을 펼쳐 들고 야트막한 높이에서 폴짝 뛰어 내리는 놀이를 즐겼던 코흘리개들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윤종원 IBK기업은행장이 3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0년 범금융 신년인사회에 참석했다가 행사 도중에 행사장을 빠져 나가 차에 오르고 있다. [조성우 기자]

우리나라 하늘에 낙하산이 처음 펼쳐진 것은 6·25한국전쟁 때다. 미국 제101공수단이 평안북도·함경남도 등에서 고공침투 작전을 실시했다. 한국군이 자체적으로 고공강하 기술을 도입한 것은 1960년이다. 이후 제1공수 특전단에 최초 고공기본교육과정이 생겼고, 1976년에는 고공강하 교육 1기생을 배출했다. ‘머나먼 다리’가 1977년에 국내 극장에 걸렸으니 아마도 1기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솟아오르는 애국심 때문에 가슴이 벅찼으리라. 조국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도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뭉클하다.

한국군에서 가장 많이 고공강하를 한 군인은 황성덕 예비역 원사다. 1980년 임관 이후 34년간 6300여회나 상공에서 몸을 던졌다. 엄청난 기록이다. 지난 2013년 10월 건군 65주년 국군의 날 행사의 마지막 고공강하 퍼포먼스를 끝으로 군복을 벗었다. 산전·수전을 넘어 공중전까지 두루 경험한 ‘하늘의 사나이’다. 이처럼 낙하산은 군인들에게 명예와 자부심의 상징이다. 극한고통의 훈련을 마친 후 생명을 걸고 비행기 점프에 성공해야만 군복 상의 왼쪽 상단에 빛나는 휘장을 붙이는 것이 허락됐다. 황 원사 가슴에도 1000번 이상 뛰어 내려야 부착할 수 있는 ‘골드윙’이라는 황금색 공수마크가 붙어 있었다.

이런 멋진 낙하산이 요즘은 부정적 뉘앙스로 더 많이 쓰인다. 사전에도 ‘채용이나 승진 따위의 인사에서, 배후의 높은 사람의 은밀한 지원이나 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제2의 풀이가 달려있다. 프라이드(pride)의 심벌이었던 낙한산은 온데간데없다. 이젠 뒷거래·밀어주기·부정·부패의 또 다른 이름으로 낙하산이 사용돼 씁쓸하다.

윤종원 IBK기업은행장이 9일도 출근을 하지 못했다. 노조가 함량미달의 낙하산 행장을 반대한다며 출근을 가로막고 있다. 지난 3일 임명됐으니 벌써 7일째 밖으로 떠돌고 있다. 노조는 ‘단 한발짝도 들여보내지 않겠다’ ‘공공기관이 청와대 수석 재취업 자리인가’ ‘기업은행이 퇴물정치인 재활용 센터인가’ 등의 플래카드를 정문·후문과 1층 로비에 도배하고 자진사퇴를 주장하고 있다. 윤 행장도 불필요하게 노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삼청동 금융연수원에 마련된 임시 사무실서 업무를 보고 있다. 행장실이 있는 을지로 본점 10층으로 고공강하를 했지만 당장 안착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동안 국책은행 CEO 취임을 놓고 노사갈등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정부 낙하산 인사의 폐해’와 ‘노조의 지나친 실력행사’라는 의견이 팽팽했다. 이번 기업은행장 논란도 역시 시선이 엇갈리고 있다.

노조는 지난 10년 동안 조준희·권선주·김도진으로 이어지는 내부출신 인사가 행장에 선임돼 경쟁력이 크게 강화됐는데 왜 다시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 등을 거친 관료 출신을 행장에 꽂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금융기관 근무가 전무한 이력도 흠이다. 거기에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과 방문규 수출입은행장을 포함하면 3대 국책은행장이 모두 ‘문재인의 사람’으로 채워졌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부터 수차례 보은인사는 없을 것이라며 이전 정부와의 차별성을 내세웠다. 그런데 막상 임기가 반환점을 돌고 보니 예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금융권 이곳저곳에 입맛에 맞는 사람을 내려 보내고 있다.

정부와 여당의 행태도 볼썽사납다. 지난 2013년 당시 야당이었던 그들은 낙하산 기업은행장을 강하게 반대했다. 전 기획재정부 차관이 행장 후보로 떠오르자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 전원은 성명을 발표했다. “능력을 인정받은 내부출신 인사를 내치고 모피아(옛 재무부 출신 관료)를 낙하산으로 보내 얻을 게 없다”며 “정부는 좋은 관치도 있고 나쁜 관치도 있다고 강변하겠지만 관치는 독극물이고 발암물질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박근혜정부는 내부 출신이자 여성인 권선주 행장을 임명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은 여야가 바뀌었다는 것뿐인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비겁한 모습이다. 얼굴이 찌푸려진다.

행장 길들이기를 통해 노조가 더 많은 이득을 노리고 있다는 따가운 눈총도 있다. 장기간의 투쟁을 통해 임금 협상·직원 처우·인사 문제 등의 잇속을 챙기겠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윤 행장은 김형섭 노조위원장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노조는 아예 ‘대화 거부’ 방침을 밝혔다. 전국금융산업노조도 기업은행 노조 투쟁에 연대할 계획이다. 2월에 공식취임하는 박홍배 금융노조 신임위원장은 “4·15 총선까지 출근저지 투쟁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노조와 정부가 지금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지만 윤 행장의 취임은 시간문제다. 윤 행장을 기업은행장에 제청한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80학번 동기이자 행시 27회 동기다. 우애가 돈독할수 밖에 없다. 또한 대통령이 임명한 만큼 엄청난 결격사유만 없다면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높다.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노조가 요구하고 있는 청와대, 정부, 여당의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한다면 자연스럽게 사태가 봉합될 수도 있다. 다만 계속 되풀이되는 관치 논란을 잠재우려면 윤 행장 자신이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확실한 성과가 뒤따른다면 낙하산이라는 비난은 저절로 없어진다. 2020년 금융산업 환경이 만만치 않다. 윤 행장의 고민도 크다.

/민병무 금융부 부국장 min66@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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