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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소설]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 <24> - 정찬주


조이뉴스24가 소설을 연재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단편 「그림자와 칼」로 아침소설의 문을 연 정찬주 작가가 네 번째 작품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를 선보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호흡이 긴 중편소설입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은 정찬주 작가가 쓴 「작가메모」로 갈음합니다. [편집자]

금선이란 금색선인金色仙人의 준말로 부처의 별호別號라고 한다. 그러니 금선대란 부처가 있는 높은 곳이라는 말이다. 어머니는 유언처럼 남겼고, 자광스님도 친견하기를 권하는 법성선사가 거기에 있다. 부처처럼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운달산 정상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강헌은 결코 금선대를 오르고 싶지 않다. 자신이 김룡사에 온 것은 어머니의 흔적을 만나고 싶었었고, 지금은 좀 우습기는 하지만 딱따구리를 찾고 있는 중이다. 한마디로 법성선사는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강헌은 범종을 치는 노스님과 마주치고는 흠칫 놀란다.

스님과 한마디도 못하고 김룡사를 떠날 줄 알았었는데 노스님이 먼저 입을 열고 있지 않은가. 숲을 헤치고 다녔는지 스님의 머리 위에도 젖은 낙엽이 하나 떨어져 있다.

"좋게 보면 다 눈에 꽃이 되는 법이오."

"스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나 검정고무신을 신은 노스님은 이미 입을 다물어버리고 있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그러더니 지팡이를 휘휘 저으며 금선대 쪽으로 난 산길로 사라져버린다. 왜 그런 말을 툭 던져놓고 사라진 것일까. 스님의 말을 반대로 뒤집으면 눈에 독한 가시도 된다는 말이다. 강헌의 눈에서 꽃을 보았다는 말일까, 아니면 가시를 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강헌은 김룡사에 와서 내내 쓸쓸해 보이는 노스님이 궁금했었다. 그래서 강헌은 금선대 쪽으로 간 노스님의 뒤를 쫓아 올라갔다. 그러나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땀을 닦느라고 걸음의 속도를 늦추다 보면 승복 자락만 보이며 숲 속으로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30분쯤 노스님의 뒤를 쫓았을 것이다.

어느새 아침 햇살에 난반사하는 금선대가 눈부시게 보이고 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왔으므로 강헌의 호흡은 헐레벌떡 이미 거칠어져 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힘이 뚝 떨어져 나무 등에라도 기대야 할 판이었다.

가을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다. 노스님은 벌써 금선대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밖은 고무신 두 켤레만 나란히 모아져 있다. 저 한 켤레의 작고 흰 고무신이 법성선사가 신는 것이리라. 김룡사가 자랑하는 지고의 선사가 신는 신발인 것이다.

암자 벽에는 빈 나무지게가 하나 세워져 있다. 이 암자에서는 아직도 나무지게를 사용하고 있구나. 40년 전 고향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나무지게이다. 어머니는 지게질도 곧잘 하셨었지. 운달산 깊은 골짜기까지 올라가 남정네처럼 땔나무를 져오곤 하셨었지.

올해로 여든이 가까운 법성선사는 이제 지게를 질 힘이 없을 것이다. 선사가 물려주어, 지금은 시봉하는 시자侍者가 나무를 질 때 사용하는 지게일 것이 틀림없다.

강헌은 한동안 금선대 마당에서 호흡을 진정했다. 그런데 암자 기둥에는 묵언黙言이란 글씨가 붙어 있다. 함부로 말을 뱉지 말라는 선사의 준엄한 당부이다.

어쩌면 범종을 치는 노스님은 선사의 법을 이어가는 법상좌法上座인지 모른다. 그러니 스승을 만나러 등산을 하듯 산 정상의 암자까지 올라와서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헌은 땀 흘린 뒤끝의 탈진으로 물이라도 마시고 싶어진다. 그래서 부엌으로 돌아가 표주박에 물을 떠 벌컥벌컥 들이켠다. 그런데 부엌이랄 것도 없다. 쌀은 몇 됫박 될 것 같지만, 황갈색 플라스틱 물통에는 스테인리스 반찬통 한 개가 차가운 물에 둥둥 떠 있을 뿐이다.

한족에는 석간수가 대롱을 따라 졸졸 흐르고, 그 옆 반석 위에는 미처 빨지 못한 잿빛의 승려용 셔츠와 양말이 두어 켤레가 있다. 문득 범종을 치는 노스님이 주고 간 한마디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좋게 보면 다 눈에 꽃이 된다는 말이다. 마음에 따라 극락도 되고 지옥도 된다는 법문이리라. 바꿔 생각해보니 자신의 인생에 관한 한 자신이 무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된다. 자신이 자신을 묶고, 자신이 자신을 더럽히고, 자신이 자신의 생을 얽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스님의 구겨진 셔츠와 양말이 더럽게 보이지 않는다. 퀴퀴한 냄새도 견딜 만하다. 법성선사의 것인지 시자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헌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그리고는 찬물에 손을 담근다. 흐르는 석간수라 그런지 얼음물처럼 차갑다. 차가움이 머릿속까지 전류처럼 흐르는 것이다.

작가메모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는 십여 년 전에 썼던 작품이다. 어느 해 가을날 김룡사를 다녀온 뒤 그 절의 풍경이 너무 쓸쓸해서 그런 적막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듯이 그려본 작품이다. 지나친 슬픔이나 기쁨은 목을 메이게 한다. 그런데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쓸쓸함도 목을 메이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그런 적막 속에서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 그곳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식사하는 여러 스님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에게 이 작품을 딱 한 번 보여준 기억이 난다. 한 선생은 그때 '자네도 이제 소설 귀신이 됐구먼.'하고 웃으셨던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일기 쓰듯 썼기 때문에 완성도나 작품성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작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사사로운 경험적(불교적) 소재를 차용한다 해도 문학적 보편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사숙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이노우에 야스시의 「후다라쿠 항해기」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가로서 도달해 보고 싶은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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