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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형 인터파크 CEO] (8.끝) 패러다임 쉬프트, 그 열정과 희망을 위해


 

우선 버텼어야 했다. 세상은 IMF로 난리가 났는데, 천하에 둘도 없는 신기하고 편리한 서비스를 운영한다 해도 거기서 수익을 얻어 먹고 사는 것은 요원해 보이는 일이었다.

회사가 99년 최초로 외부투자를 받을 때까지 투자자 50군데는 쫓아 다녔다. 투자유치를 위해 여기저기 얘기를 해 놓고 있자면 그래도 관심을 보이는 곳은 있었다. 그런데 이 양태가 꼭 연애하는 것과 비슷했다. 대답은 여지없이 ‘다 좋은데 … 이게 문제다’라는 식이다. 나의 모습이 몹시 안돼 보였을 터이니 맘 상하지 말라고 하는 얘기였을 것이다.

한 20번쯤 투자자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웬만한 자료는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업계획서 작성용 노하우(?)가 상당한 경지로 쌓일 때쯤 되니 투자유치는 일상의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멘홀에 빠져 애타게 구해줄 사람을 기다리다 지쳐서 웬만한 인기척에는 초연해진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선 버티려면 기술용역사업이 최고였다. 부지런히 쫓아 다니면 그래도 먹고는 살만했다. 서비스를 하는 회사가 기술까지 팔고 있으니 도대체 인터파크의 정체가 뭐냐는 질문도 자주 받았다. 그 분들은 잘 모를 것이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서비스가 온다고 무심히 걸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몇 년쯤 외장을 치고만 있는 내 심정을…. 강의도 참 많이 다니면서 나중에는 술술 외울 정도가 되고 보면 나도 내 본업이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였다.

인터넷에 백화점을 고생고생하여 지어놓고 장사를 하려하니 아직 손님이 없어 썰렁하기만 하고, 이런 중에 다른 사람이 백화점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우리가 지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않는가 싶었다. 자존심이고 경쟁이고는 다 배부른 얘기였다.

오히려 기술사업으로 또다른 한 세상을 만들 궁리를 했다. 그저 기술용역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상점을 구축하는 소프트웨어인 Merchant S/W를 개발하기로 하고 Microsoft의 운용시스템에 빗대어 ‘Merchant는 EC의 OS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독려하기 시작했다.

세상 저편에서는 희망적인 소식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었다. 미국 아마존이다 일본 라쿠텐이다 하는 쇼핑몰들이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조달하면서 새로운 세상의 대표주자로서 급부상하고 있었다. Broadvision, eShop과 같은 기술회사들도 전자상거래 기술시장에 나와 힘을 키우고 있었다. 나와 내 직원들이 하는 고생을 처음부터 미국에서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애절하게 들기도 하였다. ‘세계적인 무엇을 만드는 것’은 그 이후로 나의 숙원사업쯤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나라 현실을 돌아보면 벤처 열풍도 거품도 그저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그래도 기쁨은 있었다.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제안서를 작성하여 국내 유수의 SI업체들과 맞붙은 ‘우체국 전자상거래 시스템 구축사업’ 입찰을 수주했을 때 우리는 분명 열광했다.

지금도 고이 보관하고 있는 입찰제안서 첫 머리는 이렇게 나간다. ‘인터넷 비즈니스의 급속한 확산과 세계 인터넷 전자상거래 시장의 폭발적 증가추세는 가히 혁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중간 대목에서는 ‘특히 국내 최초의 인터넷 쇼핑몰인 데이콤인터파크를 운영중에 있으며…’ 그러고 보니 그 때 까지도 데이콤이 회사이름에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어도 세계는 인터넷이 세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한 때 계속 공부를 할까 하고 과학사는 제법 열심히 했었는데, 토마스 쿤이 얘기한 '과학혁명기'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나는 뚜렷이 볼 수가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구 패러다임과 신 패러다임이 격렬히 투쟁하면서 사고와 믿음과 현상이 급격히 변화되는 현상이 그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IMF로 인해 한국은 2,3년 늦게 인터넷 혁명에 동승하게 된다.

좋은 사무실에 있다가 경비절감 차원에서 지하로 사무실을 옮긴 적도 있다. 그래도 벽에는 ‘21세기 전자상거래 시장 선도’라고 오만하게 걸어 놓았다. 투자유치를 위한 노력은 늘 밥먹듯이 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구원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의 포기하고 어떻게 해서든 벌어서 쓰자는 각오로 자생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나니 투자를 받게 되었다. 만고 불변의 진리다 싶었다. 대한투자신탁의 담당자 분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처음으로 하는 벤처투자니 상당한 심적부담이 있었을 텐데, 과감한 결정을 내려 주었다. 이 때부터 회사는 제대로 된 쇼핑몰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고 계속적인 상승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국내 최초로 인터넷 쇼핑몰을 열었다는 게 나의 큰 자랑거리중 하나다. 그러나 이면에는 이렇듯 서비스를 위한 마케팅 한 번 변변히 못하고 오히려 기술사업을 주업으로 악착같이 해왔던 3년이라는 세월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애인과도 같았던 '기술사업'은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회사로 넘겨주게 됐는데 그 때의 인터파크 직원들에게 가장 미안한 일이다.

사장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우정과 정리를 내세워 일을 그르치면 기업에는 치명타가 날려진다. 인터파크가 기술사업을 재정비하고 다시 출사표를 던지기까지는 그 이후 3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1년이 과거 10년과도 맞먹은 급변하는 시기에서 말이다.

당대에 기업을 일구어낸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꼭 경험하게 되는 일 중 한가지 예가 될 지도 모르겠다. 사업과 우정, 사업과 가족, 다시 말하면 사업관계와 인간관계를 다 좋게 가져가려 하지만 이게 항상 대립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내 경험으로는 내가 우정과 의리를 중요시하고 마음 여리게 굴라치면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여지없이 빈틈을 뚫고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는 사업관계도 인간관계도 다 엉망이 되곤 하였다. 이젠 둘 다를 얻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장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주변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다. 내가 순진함이라는 덫, 마음이 여리다는 덫, 쫀쫀하게 보이는 것을 지나치게 창피해 한다라는 덫을 드리웠던 것이다. 그래서 나와 일했던 가까운 사람들이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나도 삶에 회의를 느끼고 다 때려칠까도 여러 번 생각할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컸다. 시간의 흐름이 해결해 줄 것을 믿으며 위안을 삼아본다.

최초로 투자를 받은 99년 초부터 한 2년간 개인적으로는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들이 많았다. 벤치마킹을 할 기회 없이 벤처열풍의 거의 첫 테이프를 끊다보니, 주식이라고는 우리사주를 통해 받은 데이콤 주식과 인터파크 현재 지분이, 사고 팔아 본 주식의 전부였던 내게 참으로 돈이란 무서운 것이구나를 처절히 느끼게 했던 시간이었다.

동아TV를 인수할 때 데이콤에 사전내락을 받지 않은 죄(?)로 데이콤 석자가 회사이름에서 떨어져 나갔다. 데이콤이 가지고 있던 지분과 내가 외상으로 샀던 지분에 대한 대금도 한꺼번에 지불했어야 했다. 구주를 헐값에라도 팔고 급전도 마련해 갚고나니 지분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원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니라서 유상증자에 참여하고, 나와 비슷하게 시작하는 벤쳐기업을 인큐베이팅 해보겠다고 겁도 없이(?) 장내에서 지분을 처분한 것은 또 한 번의 큰 실수였다. 한 1년 동안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욕을 먹었다. CEO의 도덕성이 거론되는 상황에서는 미칠 것 같은 분노와 자괴감이 엄습하곤 했다.

누군가 ‘이과생들은 그저 룰대로 하면 다 되는 줄 알아’라고 충고한 적도 있다. 제일 속상했던 점은 돈을 가졌다고 하니까 정말 거절 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부터 만나면 결국 돈 얘기가 나왔다. 내가 한 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간과의 관계라는 것이 돈으로 인해 하나 둘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우리가 못나지 않았으면 언젠가는 불혹이 넘어 그야말로 흔들림이 없어지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인터파크에 다 집어넣고 다시 돈이 없어지고 보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인터파크의 주식은 나에게 미래와 희망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속상하고 안타까운 일도 많았지만 감상이 끼어들 시간도 없이 전 임직원이 2년간을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이제 인터파크는 제2의 도약기를 맞고 있다. 그간에 지금 인터파크와 자회사의 임원을 맡고 있는 소중한 인재들이 인터파크의 품으로 하나 둘씩 날아 들어왔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경영은 사람이다라고 하면 인터파크와 나는 제대로 경영하고 있다고 자위할 수 있을 정도다. 직원들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먼저 고생한 것이 밑거름이 되어 회사가 지금 이만큼 왔다고 믿는다.

일부는 청운의 꿈을 안고 다른 벤처기업을 창업하기도 하고, 이직은 했지만 다른 전자상거래 회사 등에서 핵심인력으로 일을 꿰차고 있다. 전자상거래 사관학교라는 얘기도 들리지만 싫지만은 않은 얘기다. 서비스도 체계화되고 안정화되고 있다.

나는 지금 정상도 아니고 중턱도 아니고 단지 전자상거래라는 큰 산을 막 올라가기 시작했다고 역설하곤 한다. 인터파크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인터넷산업도 역시 그렇다. 지금의 과제는 과연 인터파크가 최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BEP돌파와 같은 넘어야 할 작은 봉우리들도 많이 남아 있다. 신념과 용기가 내가 품에 고이 간직하고 가는 비상식량이다.

최근 몇 년간도 여러가지 역경과 환희의 순간들이 있었고 그 얘기도 여기에 담고 싶지만 이제부터 만들어 나가야 할 일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니 나머지 CEO 스토리는 뒤로 미루고 싶다. 그간 졸필이나마 관심을 가져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린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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