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내릴 때가 됐어요."
여자는 작은 거울을 꺼내서 약간 등을 돌린 자세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가지는 새벽잠에서 덜 깬 모습이었다. 눈을 듬뿍듬뿍 머리에 이고 있는 낮은 가옥들이 힘들어 보였다. 시가지를 망연히 보듬고 있는 듯한 저편의 무등산도 아직 어둠을 털어버린 모습이 아니었다.
"더운 국물이라도 마시지요."
형규는 여자의 앞에 서서 역 앞 간이식당으로 갔다. 망월동 공원묘지는 바로 간이식당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되었고, 청음사는 그곳에서 시외버스를 바꿔 타면 될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동생과 함께 자취를 했던 도회지라서 어느 길이라도 대충은 기억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여자는 우동이 만들어지고 있는 동안 잠시 자리를 비웠다. 형규는 나무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가깝게 지냈던 동창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공대에 진학했다가 단전호흡 학원의 강사가 돼 버린 승기. 연극배우의 꿈을 키우다가 배추장사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영태. 대학 입시 원서를 써 놓고도 원효암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은 계현이. 이러한 굴절을 두고서 운명이라고 하는 것일까. 갑자기 형규는 그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동창명단에서 벌써 빈 칸이 돼 버린 그들의 사연도 묻고 싶었고 그들이 왜 죽었는가를 알고 싶어졌다.
한참 만에 여자가 돌아왔다. 여자의 손에는 생화가 한 묶음 쥐어져 있었다. 자줏빛과 흰 빛깔의 꽃들이 서로 어울려 있었다.
"저어기, 사거리까지 갔다 왔어요."
"저도 좀 사와야 될 것 같군요."
"선생님도요?"
여자가 큰 눈을 더 커다랗게 떴다.
"네."
형규는 여자가 가르쳐 준 곳으로 갔다. 좀 전보다 차들이 더 많이 눈길을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형규는 흰 국화를 한 묶음 샀다. 꽃 들은 어디서 실려져 왔는지 살아 있는 것만큼이나 싱싱하고 향기로웠다. 우울해졌던 기분을 조금은 삭여 주었다.
형규와 여자는 서둘러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눈이 또 오려는 것 일까. 갑자기 꽃다발에 그늘이 지고 있었다.
공원묘지는 시가지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었다. 구불구불한 낮은 언덕길을 지나, 또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자 바로 눈앞에 전사자의 묘지처럼 수많은 무덤들이 나타났다.
눈 쌓인 무덤들은 주변에 푸른 나무 몇 그루씩을 키우면서 말없이 드러누워 있었다. 정적이 감돌았다. 형규와 여자는 한동안 꼼짝도 않고서 정적의 묘지들을 올려다보았다. 헐벗은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게인 듯한 건물에서는 거무스름한 연기가 폴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눈길을 여자가 먼저 걸음을 떼었다. 형규는 여자보다 조금 뒤에서 걸었다. 여자는 가게 앞을 지나서 그 화가가 묻혔다는 쪽으로 발자국을 만들면서 걸어갔다.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여자는 무덤 사이로 난 길을 찾으면서 곧장 올라갔다.
비석과 비목만이 눈에 파묻히지 않고 드러나 그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었다. 눈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꽃송이들이 놓인 곳도 있었다.
형규는 걸음을 멈추었다. 무덤이 흉측하게 파헤쳐진 곳이 여기저기 보였다. 눈 속에서 황토흙이 선명하게 드러난 곳도 있었다. 눈이 쌓이지 않은 잔솔 밑이었다. 형규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밋밋한 무덤 앞에다 꽃을 놓았다. 여자도 화가의 무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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