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이미영기자] "우리 착한 아람이, 거기 숨어있었구나."
세탁기에 숨어든 아이를 찾는 엄마의 얼굴은 섬뜩했고,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숨죽였다. 낯선 배우가 뿜어내는 광기 어린 눈빛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방송 후 각종 게시판을 통해 '짤방'이 화제가 됐다. '세탁기 아줌마'로 불린 이 배우의 이름은 배정화였다.
배우 배정화가 OCN 드라마 '보이스'의 2회와 3회 '힐링마마의 두 얼굴' 편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7살 아이 아람이(최승훈 분)의 엄마 오수진 역을 맡아, 제목 그대로 두 얼굴을 선보였다.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착하고 선량한 엄마였지만, 아이를 잔인하게 학대하는 부모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어릴 적 아동학대 사건의 피해자였던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2회에 걸친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분한 그는 방송 후 화제의 중심에 섰다. 특히 '세탁기신'이 나가고 난 후 그녀의 존재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배정화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 못 했다"며 신기해했다.
"반응을 보고 엄청 놀랐죠. 시청자들도 제가 알려진 배우가 아니라 더 궁금해하고, 더 몰입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무섭게 나올줄 몰랐어요. 화면을 보고 소리를 쳤죠. 방송이 되고 난 후에는 잔상이 남아, 저 역시 심장이 두근거려 잠을 못 잤어요. 저희 가족들은 방송 당일 충격을 받았는지 연락도 없었고, 친구들은 '세탁기만 봐도 네 생각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짤방'이 돌아다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만큼 몰입을 해주셨다는 뜻이라 배우로서 뿌듯하고 고맙고, 또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아동학대 범죄에 많은 이들은 분노했다. 엄마로부터 학대 당하고, 피 흘리는 배를 부여잡고 세탁기에 숨어 벌벌 떠는 아람이(최승훈 분)의 모습은 가여웠고, 또 잔인했다. 혹여 어린 아역배우가 상처 받지 않을까 걱정한 이들도 있었다.
"촬영을 하기 전에 아람이(최승훈 분)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아람이는 베테랑이어서 촬영장에서 잘 지내고, 연기도 너무 잘하더라고요. 내내 감탄했어요. 아람이와 호흡도 좋은 편이었죠. 많이 걱정했던 세탁기신도 현장에서는 오히려 공포스럽거나 무섭지는 않았어요. 촬영은 순조로웠고, 몰입해서 NG 없이 촬영했어요. 편집이 공포감을 배가시켜준 것 같아요."
아동학대의 상처를 지닌 피해자인 동시에 아동학대의 가해자가 되는 배정화 역시 이같은 캐릭터를 소화하는 것이 심적으로 힘겨웠다. 두 얼굴의 '힐링 마마'를 소화하기 위해 고민도 많았다.
"저 역시 분노했고, 아람이 엄마의 행동을 절대 합리화 시킬 생각은 없었어요.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정당성을 줄 수 없어요. '끝까지 나쁜 여자고 포장할 생각이 없다'는 감독님의 말에 저도 동의했어요. 다만 동정은 못 받겠지만, 일말의 합리성은 줘야 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인물을 구축했고,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고민했죠."
'세탁기신'만큼 그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장면 또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배정화는 "감정신이 힘들었다. 모든 것을 쏟아내야 했기에 중요한 장면이었고 잘하고 싶었다. 내가 오디션에서 '잘할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잘할 수 있을까 불안감과 부담감이 있었다. 촬영을 끝내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내겐 계속 무거운 짐이었다"고 말했다.
드라마 전체 분량으로 치면 배정화가 나오는 신은 사실 그리 길지는 않다. 그러나 단 2회를 위해 배정화는 두 달을 준비했다. 다이어트도 하고, 아동학대에 대한 책도 읽으며 캐릭터를 분석했다.
"촬영이 미뤄지다보니 본의 아니게 두 달을 준비하게 됐어요. 피폐해 보이기 위해 얼굴살을 빼야겠다고 생각 했었죠. 그런데 예민해져서인지, 제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빠졌어요. 화면을 보니 약간 괴기스러운 느낌도 나고, 살 뺀 효과가 있었죠. 비슷한 인물이 나오는 영화는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어요. 흉내만 낼 것 같았거든요. 동네 도서관에 가서 범죄, 심리학 도서를 봤죠.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시청자들에게 얼굴이 낯선 배정화는 대학로와 충무로에서 활동을 한, '잔뼈'가 굵은 중고 신인이다. 연극에서 함께 했던 조재현의 권유로 영화 '콘돌은 날아간다'의 오디션을 보고 스크린 데뷔를 했으며, 2014년 영화 '살인재능'으로 주목 받았다.
어쩌면 누군가의 눈에는 '무명 배우'로 비칠 수도 있었던 긴 세월, 그러나 그는 "연기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묵묵하게 버텨왔고, 연기해왔다.
"'진작에 빨리 카메라 연기를 하지'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런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어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초조함이야 왜 없었겠어요. 2009년 즈음엔 너무 힘들어서 '연기는 할만큼 했다'라는 생각으로 인도로 가서 반 년 정도를 지낸 적이 있어요. 그 때 처음으로 '연기를 정말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한국에 와서 오디션도 보고 연극도 했죠. 내가 연기를 하고 배우를 하는 건 운명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조급함은 '빨리 빛을 봐야하는데'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농익은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데 과연 그런 배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조급증이 있어요."
배정화의 주관은 뚜렷했다. 무명과 유명 배우로 선을 긋지도 않았다. 그는 "나름의 장단점이 있지 않겠나. 유명배우면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고르는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 좋을 테고, 무명이라면 또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열정과 희열이 또 있다. 일희일비 하지 않고 작품을 하고싶다"라고 말했다. 유명 배우가 목표가 아닌, 연기에 대한 열정과 진심이 있기에 가능한 소신이었다.
배정화는 많은 작품을 하고 싶고, 연기를 꾸준히 하고 싶다. 그는 "센 캐릭터부터 시작을 해서인지 센 캐릭터가 많이 들어왔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좋지만, 로코도 해보고 싶다. 2017년엔 꼭 로코를 해보고 싶다"며 웃었다. '보이스'를 통해 '신스틸러' 탄생을 예감케 한 그녀, 어쩐지 2017년 기운이 좋다.
조이뉴스24 이미영기자 mycuzmy@joynews24.com 사진 정소희기자 ss082@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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