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이성필기자] "이제 막노동이나 해야죠."
대한축구협회가 지난 8일 이사회에서 홍명보(48) 전무이사와 박지성(36) 유스전략본부장 선임을 발표하던 날 기자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2007년께 유소년 축구 금석배 취재를 통해 알게 된 고교 지도자 A씨였다.
A씨는 "큰일 났다. 한국 축구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학원 축구팀들은 고사하고 있다"며 유소년 육성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국 유소년 축구는 학원 축구와 클럽 축구가 애매한 공존을 하고 있다. 프로팀 산하 유스시스템에 우수 선수가 몰리고 있는 것이 시대의 변화라는 것은 모르는 축구인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전국대회에서 클럽 산하 팀을 피해서 조편성이 이뤄지거나 참가 횟수 제한 등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축구협회는 8대8 축구 등 나름대로 틀을 잡기 위해 노력 중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선수만 키워지고 있다는 우려를 모르지 않고 있고 연구, 개선 중이다. 권역별 선수 육성 체계인 골든에이지를 통해 더 나은 선수를 보려 하고 있다. 이 때문에 A씨의 호소를 들은 기자는 그저 지도자의 어려움으로 판단하고 넘기려 했다.
그런데 A씨는 "이 기자, 요즘 일반 학원 축구부 사례 좀 확인해봐요. 지역에서 그래도 명맥 유지하는 축구부는 다 없어져"라고 말을 건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오랫동안 연락하고 지내는 경남 밀양 밀성중학교 백승인(39)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감독은 무슨 감독입니까. 12월부터 백수입니다. 공사장에서 벽돌이나 나르려고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밀양은 '꽁지머리' 김병지(48)를 비롯해 김용대(39, 울산 현대), 이상호(30, FC서울) 등을 배출한 도시다. 경상남도 축구 메카로 불리는 진주 못지않게 다수의 국가대표를 낳은 지역이다. 백 감독은 밀양이 고향이고 '절친' 김용대와는 함께 축구를 했다. 한국철도(현 내셔널리그 대전 코레일)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육군에서 일반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뒤 모교 밀성초등학교 코치를 거쳐 2006년 11월 밀성중학교 감독을 맡았다.
밀성중은 1998년 12명으로 구성해 창단됐다. 2001년 청룡기 우승으로 학교 이름을 알린 뒤 꾸준하게 성적을 냈다. 2009년 추계중등연맹전 우승을 했고 2010년 춘계중등연맹전 3위, 2011년 추계연맹전 3위, 2013년 탐라기, 무학기 3위 등 쉽지 않은 여건에서도 일정 수준의 성과를 냈다. 올해 춘계 연맹전 15세 이하(U-15) 봉황그룹 3위에 올랐다.
코치부터 감독을 거치면서 다수의 프로 선수도 육성했다. 이상호부터 박동진(광주FC), 장성재(울산 현대), 김현욱, 문상윤(이상 제주 유나이티드)이 백 감독을 거쳐 갔다. 연령별 대표에도 꼭 1~2명씩 제자가 뽑히는 등 지도자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성과도 있었다. 밀양 시내에 이들이 연령별 대표, 프로팀에 갔다는 현수막은 크게 내걸리고는 했다.
백 감독은 "전에 (문)상윤이가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뒤 스승의 날 '감독님이 잘 지도해주셔서 여기까지 왔다'고 전화가 오는데 정말 행복하더라"고 했다.
그런데 밀성중 축구부는 12월 해체된다. 현재 남은 선수도 10여명 남짓이다. 왜 그럴까. 백 감독은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현재 한국 축구는 프로팀 유스에 우수 선수가 몰린다. 프로팀 산하에 진학하지 못한, 남은 선수 중 가능성 있는 자원들을 학원 축구가 키울 수 있다. 그런데 불합리한 구조가 선수들의 의지를 꺾고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 유스는 경쟁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공부를 병행하니 성적과 실력이 어느 정도는 갖춰져야 한다. 1학년 때 잘하고도 2학년 때 여러가지 평가에서 부족하면 팀에서 나가는 경우도 있다. 피라미드 구조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경쟁이다.
탈락자로 불리는 이들을 받아서 재육성하는 곳이 학원 축구팀들이라고 봐야 한다. 나름대로 지도자가 진학 노하우도 갖고 있다. 지도자 개인의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최대한 상급 학교로 보내서 선수 또는 축구 관련 다른 일을 하도록 길을 잡아주고 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OOO 축구교실'처럼 일반 클럽팀은 선수가 아닌 취미로 가르치고 있어 더 애매해졌다.
백 감독은 "학원 축구팀들은 명맥을 유지하려면 성적을 내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형화된, 성적 내기에 특화된 축구를 해야 한다. 왼발 킥이 뛰어나거나 드리블이 좋거나 공간에서 볼을 잘 소유해 골을 넣는 등의 특징 있는 자원 발굴은 없어야 한다. 그저 기본만 가르치고 팀이라는 틀에 묶으면 된다. 성적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이상하겠지만 적어도 축구 선수를 하고 싶게 키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개성이 없는 선수들이 커서 프로에 가고 국가대표가 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며 걱정했다.
골든에이지에 주중에 보내고 주말에 팀에서 활용하는 현실은 더 최악이다. 경남의 경우 창원에서 모인다. 오후 4시에 골든에이지가 시작되면 오전 수업만 받고 창원까지 1시간 넘게 이동해야 한다. 공부하는 축구 선수 육성과는 괴리가 있는 셈이다. 망가져 돌아오는 선수를 주말리그를 치러야 하는 소속팀에 맞추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야말로 악전고투다.
축구에 입문하는 자원이 줄어드니 농촌형 소도시인 밀양에서 축구부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히 어렵지 않느냐는 냉정한 질문에 백 감독은 손사래를 쳤다. 연고 프로팀 경남FC 유스 토월중과 비교해 밀성중의 실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는 백 감독은 "밀양에 고등학교가 없지만 다른 지역 고교로 제자들을 항상 보냈다. 타 도시에서 밀양에도 좋은 초, 중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는 경우도 있다. 합숙을 할 수 없으니 부모님이 와야 한다고 하면 이사를 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 친구들이 잘 커서 밀양이라는 도시를 알린다면 학교나 개인, 지자체 모두 좋은 것 아닌가"라며 한숨을 쉬었다.
굳이 백 감독이 아니더라도 일선 지도자들에게 물으니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도시의 이름을 건 학원팀 내지는 일반 학원팀이 유지되면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선수를 키워 올리는데 이제는 그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단다. 밀성중이 해체되면 하부팀인 밀성초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밀양의 축구 시스템이 뿌리째 뽑히는 셈이다.
단순히 밀양의 문제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경남으로 범위를 넓히면 축구부가 없어지는 도시는 더 늘고 있다는 것이 다수 지도자의 설명이다. 밀양이 흔들리면 경남 축구의 세포 한 부분이 파괴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뒤따르는 인프라 구축도 마찬가지다. 더 정확하게는 수도권 밖 지역들의 풀뿌리 축구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이미 한국 축구 환경이 싫은 자원들은 해외로 나가 배우고 있다. 상당한 비용 지출을 하며 성공하는 사례는 정말 드물다. 시스템의 위기가 불필요한 지출을 불러오고 있는 셈이다. 축구협회의 오랜 계획인 디비전 시스템 구축 의도에도 맞지 않는 상황이다. 프로 산하가 엘리트 선수 육성을 사실상 전담하고 있다고 해도 학원 축구의 기능 상실이 이어진다면 무소용이다. 선수가 아니더라도 관련 산업 인재로 육성 가능하게 해줘야 하는데 일찌감치 희망이 꺾여 버리는 것이다.
백 감독은 축구협회를 향해 딱 한 마디만 했다. "서울에만 있지 말고 각 지역을 돌면서 지도자들을 하루씩만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라. 그러면 지금 한국 축구의 위기와 개선 방향이 보일 것이다"고 외쳤다. 한마디로 성인대표 중심으로만 정책을 짜는 축구협회의 전략이 실패했으니 바닥부터 보고 새 출발을 하라는 뜻이다.
축구협회 살림을 관장하는 홍명보 전무와 유소년 육성에 고민하는 박지성 본부장이 새겨들어야 하는 한국 축구의 냉엄한 현실이다. 그나마 두 '전설'이 유소년 육성에 골몰해왔다는 점은 다행이다. 뿌리가 흔들리는 한국 축구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
조이뉴스24 이성필기자 elephant1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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