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이성필 기자] "러시아! 러시아!"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가장 응원을 못 하는 국가를 꼽으라면 단연 러시아다. 국가명만 외치는 것 외에는 딱히 보여주는 것이 없다. 거리에서도 경기장에서도 그저 '러시아', 좀 더 발음에 가깝게 하면 "러씨아~!" 또는 "로씨아~!"만 외친다.
이른바 바이킹 박수로 시선을 끈 아이슬란드나 광적인 응원을 앞세운 멕시코 등 각자 특징이 있지만, 러시아만 유독 경기장에서 심심한 모습을 보여줬다.
1일 오후(한국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러시아-스페인의 16강전도 그랬다. 안전 요원들의 강력한 통제로 인해 응원 자체가 쉽지 않았다. 통로에 발이라도 내밀면 바로 지적당하기 다반사였다.
팬 ID 미착용자는 확인이 될 때까지 자리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다양한 국가의 국기를 흔드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러시아 내 자치공화국 깃발이 보이면 곧바로 압수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페인전 북쪽 관중석에 러시아 국기를 기반으로 한 대형 통천이 펼쳐졌다. 러시아의 8강 진출을 기원하는 마음이 그대로 담겼다.
안타깝게도 통천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이날 경기는 스페인이 홈팀 자격이었다. 북쪽 관중석 하단에는 스페인 관중 상당수가 무리 지어 앉아 있었다. 당연히 통천은 한 번에 펴지지 않았다. 억지로 당긴 뒤에야 본모습이 나왔다.
환호 대신 탄식이 먼저 나왔다. 전반 12분 세르히오 라모스와 경합하던 세르게이 이그나셰비치가 자책골을 기록했다. 7만8천11명 대관중의 대다수를 차지한 러시아 팬들의 한숨이 경기장을 적막에 빠트렸다.
그러나 단순한 구호 "러시아~"는 점점 더 위력을 발휘했다. 한쪽에서 바이킹 박수가 나오다 멈췄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몸을 던지는 선수들의 투혼에 절로 함성이 나왔다. 41분 아르템 주바의 페널티킥 골이 나온 뒤 경기장은 용광로처럼 뜨거워졌다. 파도타기가 이어지는 등 스스로 분위기를 만들었다.
흥미롭게도 연장까지는 2002 한일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을 보는 느낌이었다. 스페인의 잔패스를 활동량으로 파괴하며 어떻게든 8강에 가겠다는 의지가 나왔다. 당황한 스페인은 슈팅을 난사했지만, 러시아 수비를 당해내지 못했다.
팽팽한 승부에 이미 취기가 오르고도 맥주를 사다 나르던 팬들이 알아서 "러시아~"를 외쳤고 바이러스처럼 경기장 전체에 퍼졌다.
결국 승부는 승부차기까지 갔다. 모두가 핸드폰을 들고 차가운 승부를 찍었고 '기름 손'이라는 오명을 벗겨내지 못했던 이고르 아킨페예프 골키퍼가 코케와 이아고 아스파스의 킥을 막아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승부차기는 한일월드컵 8강전, 공교롭게도 당시도 스페인이었다.
기자석에 있던 러시아 기자들도 모두 일어나 환호하며 "러시아"를 외쳤다. 다른 나라 기자들로부터 "축하한다"는 환호가 쏟아졌다. 러시아라는 국가명으로 처음 진출한 8강이라 여기저기서 감격의 웃음과 눈물이 뒤섞였다.
이후 관중석에서는 다른 함성이 퍼져 나갔다. 벤치의 스타니슬라브 체르체소프 감독에 대한 환호였다. 홈팬들이 만든 분위기를 100% 활용한 러시아다.
조이뉴스24 모스크바(러시아)=이성필기자 elephant14@joy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