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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소설] 자화장 <2> - 정찬주


조이뉴스24가 단편소설을 연재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림자와 칼」로 아침소설의 문을 연 정찬주 작가가 두 번째 작품 「자화장」을 선보입니다. 작품은 수행자들이 용맹정진하는 절집이 배경이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자아의 본질을 되새기게 하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편집자]

장대 끝에 불을 붙인 거화봉들이 일제히 연화대 밑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연기만 솟아올랐다. 잠시 후에는 불길이 삐쭉삐쭉 장작더미를 뚫고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골방 문이 확 떨어져나갈 듯 열리더니 법성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못난 놈!"

법성이 바싹 마른 삭정이로 우멸의 어깨를 후려쳤다. 우멸은 날아온 삭정이를 맞으며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법성이 한 마디를 더 내뱉고는 나가버렸다.

"어리석음을 멸하라고 우멸(愚滅)이란 법명을 주었더니만 요원한 일이구나!"

우멸은 텔레비전을 껐다. 법성이 텔레비전을 부숴버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우멸은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화가 나기도 해서 암자 골방을 나와 텃밭으로 갔다. 텃밭은 배추와 무만 파랄 뿐 서리 맞은 옥수수와 고추, 오이 덩굴 등은 누렇게 죽어 있었다. 텃밭 끝에는 서너 사람이 좌선할 수 있을 정도의 거무튀튀한 반석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법성은 평소에 반야용선이라고 불렀다. 우멸은 반석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었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명상을 하면 소용돌이치던 잡스런 생각이 가라앉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못난 놈!'이란 꾸지람을 들은 탓인지 마음은 더 심란하기만 했다.

쌀쌀한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우멸은 겨우 평상심을 되찾았다. 반석에서 좌선하고 있는 지금과 조금 전 자신의 내면이 보였다. 조금 전의 자신이 흙탕물이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정수기에 걸러진 물 같았다. 그러나 우멸은 ‘못난 놈!’이란 법성의 꾸지람이 또다시 떠올라 맑은 물이 다시 흙탕물로 변한 느낌이 들어 허탈했다. 우멸은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내면을 보면서 실망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나무랐던 법성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우멸은 혼잣말로 항변했다.

'어리석음을 멸했다면 이미 부처가 아닙니까!'

암자 가까운 곳의 텃밭에는 가을상추가 땅바닥에 바짝 붙어 자라고 있었다. 고산의 냉기 탓에 이파리가 쭉쭉 자라지 못한 채 오글오글했다. 우멸이 삭정이를 옮기고 있는 법성에게 다가가 합장했다. 그러자 법성이 받아주었다.

"장작은 네가 패거라."

"예, 큰스님."

"이놈아, 스님이면 스님이지 어디에 큰스님이 있고 작은 스님이 있느냐?"

"예, 스님."

"장작은 장작대로, 삭정이는 삭정이대로 벼늘을 만들거라."

법성의 목소리는 금세 자애롭게 변해 있었다. 우멸은 질문해도 될 때다 싶어 법성에게 물었다.

"스님, 여름부터 모으신 삭정이만으로도 겨울을 날 것 같습니다. 이제 장작은 그만 준비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장작 패는 것이 힘들어서 그러느냐?"

"날도 추워지는데 스님께서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하다못해 똥 싸는 일도 쓸모가 있지. 밭에 거름이 되지 않느냐."

법성이 산자락에서 끌고 오는 나무들은 모두 말라죽은 것들이었다. 생나무는 단 한 개도 없었다. 우멸은 암자 뒤뜰에 자라는 굴참나무를 베었다가 야단맞은 적이 있었다. 잎들이 양철지붕에 떨어져 쌓여 썩는 것을 막고자 굴참나무를 베었던 것인데, 법성이 이틀 동안이나 우멸을 보고도 침묵했던 것이다. 그만큼 법성은 푸나무들을 사랑했다. 단 두 사람이 사는 산중암자에서 한 사람이 침묵해버리면 나머지 한 사람은 허수아비나 유령 같은 처지가 돼버렸다. 그러니 우멸은 은사 법성 앞에서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곧바로 참회했다. 그렇지 않고는 유령 같은 신세를 견디어낼 수 없었다.

그날 밤. 보름달 달빛이 보자기만 한 창호에 유난히도 일렁거렸다. 우멸은 밤공기가 차가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바깥으로 나갔다. 보름달이 자애롭게 다가와 우멸을 비추었다. 달빛이 '못난 놈!'이란 말에 사로잡힌 우멸을 감쌌다. 암자 마당에는 달빛이 한 줌 한 줌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된서리가 내린 잣나무 이파리들은 바늘처럼 반짝거렸다. 우멸이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는 적막한 풍경이었다. 어떤 밤에는 암자 안팎의 적막이 그윽한 심연 같아서 익사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리산 밖으로 나가 있는 동안에는 심연 같은 적막이 그립기조차 했다. 그때마다 우멸은 허망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멸은 툇마루에 앉아서 아침에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법공의 영결식을 떠올렸다. 일부러 떠올렸다기보다는 산등성이를 구르는 것 같은 보름달을 보는 순간 생각이 났다. 법성의 사숙 월적의 입적과 크게 비교가 되었다. 월적의 입적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법성은 월적이 중답게 입적했다고 가끔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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