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란 감정도 풍화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는 큰 슬픔이 바위처럼 굴러와 얼을 빼놓더니, 49재를 지내고 나자 바위가 돌멩이로 풍화되듯 비감한 심정도 차츰 쪼개져 흩어지는 것 같았고, 그 후로는 어느새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모래처럼 잘게 부서지고, 마침내는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듯하였으니까.
운곡은 주지스님이 어려운지 솔차와 송이버섯이 담긴 작은 바구니를 놓고 해운암 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송이버섯은 겉보기에는 여느 버섯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우산 모양인데, 마치 흙 속에서 캐온 인삼 뿌리처럼 흙이 묻어 있었고, 솔향기는 이미 채취한 것인지 생각과는 달리 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나 자광스님이 과일 껍질을 벗기듯 과도를 대자마자 송이버섯의 강한 솔향기가 강헌의 코끝에 전해왔다.
자광스님은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겨내면서 송이버섯에 대해서 말했다.
"소나무의 기氣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솔향기가 나지요."
"그렇군요."
"송이를 먹으면 아침 변 색깔이 달라집니다."
식용이지만 몸에 약도 된다는 말이었다. 비닐막 같은 엷은 껍질을 다 벗겨내자 송이버섯의 속살은 눈처럼 희었다. 그러나 솔직히 강헌은 송이버섯의 상큼한 향기에도 불구하고 아직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만, 솔잎을 발효시킨 것 같은 솔차는 알코올 도수가 느껴져 다소 구미가 당겼다.
"스님은 김룡사에 죽 계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그 사이 여러 절 주지로 돌아다니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이 내 고향 같습니다."
"힘들지 않습니까?"
"저는 김룡사가 좋습니다. 내 아버지를 찾은 곳이니까요."
"그러니 인연이 깊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맞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아버지를 이 김룡사에서 찾았으니까요."
송이버섯을 스님 혼자만 먹기가 미안해서인지 강헌에게도 과도로 버섯을 세로로 4등분해서 한쪽을 권한다. 등분을 할 때마다 역시 솔향기가 은은하게 진동한다. 할 수 없이 스님이 먹는 방식대로 버섯에 죽염을 조금 찍어 씹어본다. 연한 고기처럼 부드럽고 쫄깃쫄깃하다. 그리고 죽염의 짠맛은 송이버섯을 물리지 않게 하고, 입맛을 당기게 하는 모양이다.
자광스님은, 조선시대 김시습金時習이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에서 수행중에 송이버섯을 먹으며 이런 시를 지었다고 소개한다.
고운 몸은 아직도 송화 향기 띠고 있네
희고 짜게 볶아내니 빛도 맛도 아름다워
먹자마자 이가 시원한 것 깨닫겠네
말려서 다래끼에 담았다가
가을 되면 노구솥에 푹푹 쪄서 맛보리.
작가메모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는 십여 년 전에 썼던 작품이다. 어느 해 가을날 김룡사를 다녀온 뒤 그 절의 풍경이 너무 쓸쓸해서 그런 적막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듯이 그려본 작품이다. 지나친 슬픔이나 기쁨은 목을 메이게 한다. 그런데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쓸쓸함도 목을 메이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그런 적막 속에서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 그곳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식사하는 여러 스님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에게 이 작품을 딱 한 번 보여준 기억이 난다. 한 선생은 그때 '자네도 이제 소설 귀신이 됐구먼.'하고 웃으셨던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일기 쓰듯 썼기 때문에 완성도나 작품성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작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사사로운 경험적(불교적) 소재를 차용한다 해도 문학적 보편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사숙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이노우에 야스시의 「후다라쿠 항해기」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가로서 도달해 보고 싶은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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