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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소설] 겨울남행 <1> - 정찬주


조이뉴스24가 단편소설을 연재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언제나 맑고 선명한 언어로 인간의 내면 이야기를 즐겨 들려주는 정찬주 작가가 이번에는 집요하고도 진득한 문장으로 지나간 시대의 아픔을 말해 줍니다. 소설에 담긴 비극은 분명 과거에 속한 것이지만 새로운 모습과 형태로, 아니 더욱 강고하게 현재를 지배하고 있기에 바로 오늘의 이야기 우리의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편집자]

낙화(落花) 같은 눈이 연일 내리고 있었다. 운동장 저편 소나무 숲은 물론 잿빛 허공까지도 점령해 버릴 듯한 기세로 내리고 있었다. 생물 반 학생들이 키우는 비둘기들이 낮게 솟아올랐다가는 다시 교사(校舍) 처마 밑으로 날아왔다. 눈송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그러는 것이었다.

젖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금세 교무실 안으로 날아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교무실 안은 밖의 풍경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토요일 오후가 되어서 을씨년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3학년 과목 선생들이 벌통처럼 생긴 난로 주위에서 웅크리고 있을 뿐, 조용한 교무실은 턱없이 넓어 보였다.

형규는 손을 비비면서 창가로 갔다. 또다시 집에서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눈이나 멎으면 내려가라는, 혼자서 어떻게 잠을 잘 거냐는 아내의 전화였다. 하지만 형규는 또 한 주일을 넘길 수는 없었다.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심사가 편하지 못했다. 결코,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강아지 혓바닥만한 열차표 때문이 아니었다. 형규의 귓속은 아직도 준세 당숙이라는 그 노인의 음성이 쟁쟁했다.

……나로 따지면 형수님 되시네. 준세 모친께서 북망 고혼이 되야부렀단 말이시…… 해서, 조카가 상주네만 상주 읎이 친지 몇이서 가장(假葬)을 허고 말았단 말이시. 허지만 생각을 해 보시게. 상주가 없는디 어찌 편히 눈을 감으셨겠는가? 어서 달려가 어른 눈을 감겨드려야 허지 않겄는가.

……세상 천지에……

노인이 먼 산을 바라보면서 타령처럼 한 말이었다.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 인간들이 야속하다는 말투였다. 허망의 그늘을 느끼게 하는 말투였다.

눈은 나목의 가지들 위에서 눈꽃을 피우고 있었다. 눈꽃은 바람이 안 부는데도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덧없이 떨어지기도 했다. "맨날 눈만 뜨면 눈이군. 젠장 방학이나 하면 내릴 일이지."

누군가 등 뒤에서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비둘기 몇 마리가 또다시 허공으로 날았다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형규는 그날 집주인 일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창턱까지 기어오른 아직 잎이 연약한 담쟁이덩굴들을 걷어내는 일이었다. 집주인은 칠을 한 다음 아예 팔아버릴 속셈인 듯했다. 그런데 담쟁이들은 보기와 달랐다. 혼신의 힘으로 차가운 벽면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지독히 억센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리한 쇠붙이로 긁어내는 데도 붙들고 있던 벽면에 흔적을 남기면서 떨어져나갔다.

전화는 그런 작업 중에 왔었다. 광주에서 걸려온 시외전화였다. 형규로서는 전혀 뜻밖이었다. ㅈ대학병원의 간호사인 여동생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여, 여긴 병원이야. 오빤 다치지 않았어? …… 다치긴, 천천히 말해봐. …… 떨려서 잘 못하겠어…… 뭐라고? …… 여긴 전쟁을 치르고 있어, 병실마다 사상자들이 가득 채워지고 있어. 서울은 아무렇지도 않아?……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통화가 불가능해져 버렸다. 그 대신 열흘 만에 준세가 찾아왔다. 하지만 형규는 아무런 얘기도 들을 수 없었다. 준세는 그곳의 얘기를 몇 마디밖에 입에 올리지 않았다. 광주의 소식을 물을 때 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심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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