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규는 안경 낀 이동판매원에게 깡통 맥주 세 개와 마른안주를 샀다. 몸을 좀 녹이려면 별 수 없이 한잔을 해야 했다. 춥기는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형규는 머뭇거리다가 여자에게 말을 붙였다.
"몸을 좀 녹이시죠. 맥주라 괜찮을 겁니다."
"……"
여자는 몇 번을 사양하다가는 깡통을 받아들었다.
"어디까지 가시죠?"
"종착역까지요. 선생님은……."
"잘 됐군요. 저두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무 추위서."
형규는 단숨에 반쯤을 비웠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불였다. 술기가 담뱃불의 온기만큼이나 몸 속을 짝 퍼져갔다.
한참 만에 여자도 술을 입에 대는 시늉을 했다.
"전 냄새만 맡아도……."
여자의 얼굴은 추위 때문에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것도 볼우물 쪽만 유난히 발개져 있었다.
형규는 문득 청음사(淸音寺)의 공양주 보살이 생각났다. 옆에 앉아 있는 여자처럼 피부가 아주 고왔다. 그러나 지금도 그곳에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녀는 스님들 빨래에서부터 밥 짓는 일을 해주면서 절을 옮겨 다닌다고 했다. 지금쯤은 아예 어느 비구니 암자에 눌러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청음사에 오래 머물렀던 것은 그 당시 대웅전 복원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웅전은 특이했다. 3층 목탑으로 규모는 별로 웅장하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청음사를 찾은 순례자들에게 법열을 안겨주었다.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해서 그 목탑을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신기루에 의해서 어느 먼 바다 밖으로부터 솟아올라 허공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따라서, 대웅전으로 들어가 금빛으로 번쩍이는 불타(佛陀) 앞에 앉아 있으면 벌써 삿된 이승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이따금 객승들이 찾아올 뿐 청음사는 신도들이 적었다. 교통이 아주 불편한 것도 아니었다. 계곡길로 오 리가 조금 넘게 떨어져 있어 한밤이면 종종 기적소리가 속기를 떨쳐 버리고 꿈결처럼 들려왔다. 바로 그러한 거리였다. 준세는 청음사 암자에 있었다.
"청음사라고 가보셨습니까?"
"네. 꼭 한번……."
"3층 목탑이 유명한 절이죠."
"그곳으로 주말여행을 하시나 보죠?"
"이번엔 여행이 아닙니다."
"불교신자시군요."
"뭐 신자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스님들한테 신세를 많이 졌죠. 그때도 서울에 있다가는 얼어 죽을 것 같아 청음사로 피신을 했으니까요."
여자는 '피신'이라는 말에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규는 자기 몫의 깡통을 마저 비웠다. 또 두 개를 샀다.
"그럼, 그곳의 심우도를 보셨겠네요? 대웅전 벽에 그려진 작품 말이예요."
"글쎄요. 제가 있을 때는…… 대웅전을 복원하기 전에 있었으니까요."
"전 그 벽화 때문에 갔었어요."
심우도(尋牛圖)란 진리를 탐구하는 열 단계의 과정이 인내심 많은 소를 찾는 비유로써 그려진 그림을 말했다.
"벽화는 매우 독특할 거예요."
"아, 미술을 하시는 군요."
"제가 하는 게 아니라 그이가 했어요. 그 벽화도요. 그게 마지막 작품이 돼 버렸죠."
"그럼…… ."
여자는 말끝을 흐리는 형규의 표정을 보면서 말했다.
"네. 그 봄날 그이도…… 그이를 만나러 가고 있어요."
"그, 그래요?"
여자는 열차의 천장을 쳐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형규는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서 깡통을 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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