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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소설] 겨울남행 <4> - 정찬주


조이뉴스24가 단편소설을 연재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언제나 맑고 선명한 언어로 인간의 내면 이야기를 즐겨 들려주는 정찬주 작가가 이번에는 집요하고도 진득한 문장으로 지나간 시대의 아픔을 말해 줍니다. 소설에 담긴 비극은 분명 과거에 속한 것이지만 새로운 모습과 형태로, 아니 더욱 강고하게 현재를 지배하고 있기에 바로 오늘의 이야기 우리의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편집자]
. [사진=픽사베이]

밖은 짙은 먹물 빛이었다. 이따금 쌓인 눈이 희끗희끗 밤바다의 포말처럼 스쳐갔다.

"우린 약혼만 하고 만 셈이 돼 버렸어요."

여자는 이제 그 남자를 잊어버리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용서를 받기 위해서 그 화가가 묻혀 있는 공원묘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형규는 다시 담배를 뽑아 물었다.

고향이 가까워지고 있는 탓일까. 형규는 느닷없이 떠오른 어머니 생각에 조금 당황했다.

어머니의 병은 형 때문에 깊어졌다. 객지의 대학을 다니던 형은 어느 날 갑자기 쫓기는 몸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그때도 어머니는 형의 허물을 자신의 업으로 돌리었다. 코가 떨어져 나가 버린 미륵 부처가 있는 절골을 더욱 더 오르내렸다. 그런데도 형이 수감되어 버리자, 어머니는 혼절을 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비질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어머니의 비질이 병인 줄 몰랐다.

아버지는 식구들의 밥을 차려주고서 마당으로 내려서는 어머니를 향해 마구 욕설을 내뱉곤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듣고도 못 들은 체 무시로 마당으로 내려서곤 했다. 햇빛을, 때로는 낙엽과 황혼을 전생의 업을 쓸어내리듯 하염없이 비질을 하였다.

"한숨 붙이시죠."

"선생님도요."

"이상하게도 자꾸 정신이 말짱해져 버리는군요."

"추워서요?"

"아닙니다. 군대에선 보초를 서면서 선 채로도 한숨씩 자곤 했지요. 영하 십 몇 도가 되는 데도 말입니다. 잠을 자면서 꿈까지 꾸었는걸요."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술기가 웬만큼 올라 춥지는 않았다. 여자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에 비친 여자의 눈은 여전히 또록또록 했다.

"벽화를 보고 싶군요."

"저두요, 하지만 이번엔……."

"차편을 걱정하십니까?"

"네."

형규는 가능하다면 절까지 데리고 가고 싶었다. 그 심우도는 여자에게 어떤 위안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숙박을 걱정하실 필욘 없을 겁니다. 비어 있는 객실이 있을 테니까요. 청음사는 적막한 절이지요."

여자는 잠깐 생각에 잠겨 보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선생님은 그곳에서 머무르실 건가요."

"아닙니다. 전 모레, 아니 이제 자정을 넘어섰으니까 내일이 되겠군요. 학교수업 때문에 들렀다 바로 나올 겁니다."

"무섭진 않을까요?"

"무섭긴요. 스님들이 계신데."

어둠이 점점 물러가는 듯했다. 창의 색깔이 변해갔다. 진한 먹물 빛의 농도가 열어지고 있었다.

"동행이 돼 버렸군요."

"여러 가지로 감사해요."

이제 이동판매원은 보이지 않았다. 그도 여느 승객처럼 잠에 떨어져 있을 것이었다. 어느 좌석으로부터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시선을 밖으로 던지면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눈 덮인 산과 들이 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과수원인 듯한 나목의 숲은 보랏빛이 연기처럼 풀어 헤쳐진 채로 스며 있었다.

잠시 후에는 열은 잉크 빛으로 물든 능선 위로 붉은 놀이 보이기 시작했다.

형규는 입안이 깔깔함을 느꼈다. 담배연기가 이제는 쓰기만 했다.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눈 덮인 농가를 보는 순간, 또 다시 준세 당숙의 목소리가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 나로 따지면 형수님 되시네. 준세 모친께서 북망 고혼이 되야 부렀단 말이시. 해서 조카가 상주네만 상주 없이 친지 몇이서 가장(假葬)을 허고 말았단 말이시. 허지만 생각을 해 보시게. 상주가 없는디 어찌 편히 눈을 감으셨겠는가? 어서 달려가 어른 눈을 감겨드려야 허지 않겄는가.

갑자기 빈 속이 쓰려왔다. 형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수도꼭지가 있는 곳을 찾았다. 그것은 화장실 옆 칸에 있었다. 형규는 수도꼭지를 비틀었다. 찬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형규는 꼭지에 입을 대고 들이마셨다. 너무나 차가와 눈물이 핑 나오려고 했다. 고개를 들어 창을 응시하는 순간에도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건널목을 지나면서 작은 방울이 딸랑딸랑 새벽공기처럼 차갑고 맑은 소리를 낼 때는 더욱 그랬다.

형규는 한참 동안을 멍하니 서 있다가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승객들은 푸석푸석한 모습으로 짐들을 챙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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