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욕심이 많은 배우다. 명랑하고 밝고 천진하게 보이는 성유리의 맑은 얼굴 뒤에는 진짜 배우를 꿈꾸는 갈망이 숨어있다. 최고의 인기그룹 핑클로 데뷔 때부터 유명세를 얻었고 어려움 없이 배우로의 변신을 이뤘지만, 성유리가 원하는 목표는 조금 길을 달리 한다.
저예산 영화 '토끼와 리저드'(감독 주지홍)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한 성유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우울하고 냉소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다.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돼 좋은 양부모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마음 속 깊이 고독과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는 여자 '메이' 역할이다. 성인이 돼 어머니를 찾아 고국에 돌아왔지만, 그를 반겨주는 현실은 낯설고 절망적이다.
올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된 '토끼와 리저드'는 성유리의 스크린 데뷔작이자 색다른 캐릭터 연기로 관심을 모았다.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19일 오전 서울 압구정 카페에서 만난 성유리는 '영화계 신인배우'의 겸손함과 호기심을 털어놓았다.
"가수는 배우를, 배우는 가수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성유리는 배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어왔다. 핑클 시절 우연히 만난 정우성과 전지현을 보고 "우와, 연예인이다"를 외칠 정도로 스크린에서 만나는 배우에 대한 이미지는 신비로웠다고 한다.
스크린 데뷔작으로 고른 '토끼와 리저드'는 사실 성유리가 가장 원했던 이야기,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다. 그동안 핑클 활동과 드라마 연기를 통해 밝고 명랑한 캐릭터로 익숙해진 것과 달리 성유리는 "우울하고 진지한 작품을 좋아한다"고 한다.
드라마와는 확연히 다른 영화 작업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성유리는 이번 작품을 위해 개런티 전액을 포기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영화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는 성유리는 소위 '망가짐'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갖춘 상태다.
"망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요. 예쁜 모습은 CF나 화보를 통해서 항상 보여줄 수 있지만, 영화 속 캐릭터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죠. 핑클 때부터 예쁜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익숙하니까 보는 분들이나 저 역시 싫증났을 것 같아요. 예쁜 캐릭터는 이제는 그만 하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웃음)."
영화 개봉 후 관객들이 새로운 모습에 도전했다는 것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성유리.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곳, 해외에서의 활동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욕심 많은 배우 성유리의 제2의 연기 인생을 기대해 본다.
이하 일문일답
-'토끼와 리저드'를 선택한 이유는?
"기존에 했던 역할과는 다르다는 점에 끌렸다. 그전에는 밝고 명랑하고 캔디같은 역할만 제의가 들어왔는데, '메이'는 상반된 캐릭터라 마음에 들었다. 이런 류의 영화가 안 들어왔는데, 한마디로 꽂혔다.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바로 하겠다고 말 했다."
-영화 데뷔작인데 이런저런 부담은 없나.
"영화를 보고 흥행 걱정이 되지 않느냐는 말씀들을 많이 한다. 솔직히 첫 영화라 다른 외부적인 조건은 생각하지 못했다. 캐릭터와 시나리오가 좋았기 때문에 그것만 생각했다. 흥행과 비흥행이라는 구분을 짓기는 그렇지만, 흥행에 영향을 받는 영화가 아니어서 더 좋았다."
-지난 부산영화제로 첫 영화제 나들이를 경험했는데, 소감은?
"영화제와 레드카펫, 그리고 스크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그 전에도 영화제는 내 일이 아닌데도 챙겨보고 혼자 흐뭇해 하곤 했다. 동참할 수 있다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부산영화제는 첫 레드카펫이어서 그런지 정신이 없더라. 사람도 많고 레드카펫이 길기도 하고. 첫 시사 때는 너무 떨렸다. 색다른 모습을 봐서 좋았다고 하는 평가가 기억에 남는다."
-가수 활동이 연기하는데 있어 도움이 됐을 것 같다.
"카메라에 대한 공포가 적다는 것은 장점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신인들이 겪는 카메라 울렁증은 없었던 것 같다."
-반면 단점이 있다면?
"보통 댄스그룹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수 활동 때 밝고 명랑하고 기쁨을 주는 이미지가 많아서인지, 그런 류의 캐릭터에 한정돼서 제의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보면 밝은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닌데, 밝은 면이 강조되다 보니 한쪽 면에만 치우치는 것 같다."
-이번 역할을 연기하는데 중점을 둔 부분은?
"한국말을 잘 하는 입양아 설정인데다 영어 대사도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그런 점의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대사가 너무 없어서 좀 힘들었다. 미묘한 감정을 말이 아닌 표정으로 표현해야만 하는 신이 많아서 어렵더라. 새롭고 낯설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입양아 메이 캐릭터에 특별히 마음이 끌린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보통 입양아 소재라면 떠올리는 그런 코드가 없었다. 부모를 만나 오열하고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촬영 전에 입양아 다큐를 많이 봤는데, 양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좋은 환경에 살았어도 아픔이 있고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진 것이 그들의 아픔인 것 같았다. 일상적이면서도 아픔이 잔잔하게 끌고 나가는 캐릭터라 배우가 채워야 될 부분이 많다는 것이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메이도 자신의 아픔을 세상과의 단절과 고립을 통해 보여주는 인물이다. 나 또한 대외적으로는 밝고 명랑하지만 사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다. 연예계 일을 하면서 나만의 선이 생겼다. 이 정도 이만큼만 나를 보여주자 하는 그런 나름의 벽을 세워 놓았다. 그런 면에서 메이라는 캐릭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에게 미묘한 감정을 주는 스물아홉살의 나이를 지나고 있는데, 어떤가.
"주위에서 스물 아홉 살을 먼저 겪은 언니들이 굉장히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막연히 겁을 냈었다. 나의 스물아홉은 어떨까 상상만 했는데, 정신없이 일만 하느라 이런저런 감정을 느낄 짬이 없었다(웃음). 그동안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싫었는데, 올 크리스마스는 많은 사람들과 재미있게 지내고 싶다."
-서른살의 성유리는 어떤 모습이었으면 하는지.
"내 20대는 과도기였던 것 같다. 가수에서 배우로 넘어가는, 소녀에서 여인으로 넘어가는 그런 과도기였다. 시행착오와 시련이 있었지만, 덕분에 30대는 확실한 목표가 세워졌다. 갈등이나 방황을 접고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안정된 삶을 살 것 같다. 20대는 배우가 나의 길이 맞나 하는 의문과 싸웠지만, 이제는 배우로 사는 삶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도 하고 싶다. 결혼도 너무 늦지 않게 하고 싶고."
-첫 영화 작업이 만족스러웠나 보다?
"배우가 감정에 최대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모든 사람들이 만들어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 스태프들도 모두 프로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드라마는 순발력이 중요한데 영화는 감정을 깊게 오래 유지해야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어려웠는데 적응하고 보니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지금까지는 한 두 가지 색깔을 보여줬다면 영화에서는 많은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라비앙 로즈’라는 영화를 봤는데, 예쁜 여배우가 노역 분장까지 하면서 역할을 표현하는 것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일상을 표현하는 것에도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런 캐릭터를 연기해 보고 싶다."
-역할을 위해 망가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망가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 예쁜 모습은 CF나 화보를 통해서 항상 보여줄 수 있지만, 영화 속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 핑클 때부터 예쁜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익숙하니까 보는 분들이나 나 역시 싫증이 날 것 같다."
-관객들에게 원하는 평가가 있을 것 같다.
"캐릭터 변화를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로운 장르의 멜로라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영화에서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를 꼽는다면?
"정재영, 박희순 씨와 멜로 연기를 하고 싶다. 두 분의 전작을 보니 애절하고 묘한 느낌의 멜로 연기가 인상적이더라. 뭐랄까 진짜 배우같다는 동경을 갖게 하는 분들이다. 그분들과 함께 연기하면 나도 많이 성장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자연인 성유리는 어떤 소일을 하며 지내나.
"친한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도 좋아한다. 핑클 멤버들은 자주는 못 보지만 만나서 수다로 회포를 푼다. 가급적이면 일 얘기는 안하는 것이 원칙이다. 집에 있을 때는 영화보고 책 읽기가 취미다. 요즘도 일 끝나고 하루 종일 자다가 밤에 일어나서 책 읽고 영화보고 또 자고 그런다. 글 쓰는 것도 좋아해서 시나리오도 몇 편 써 놨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내 시나리오가 영화화됐으면 하는 마지막 바람이 있다(웃음). 집에 일단 들어가면 도통 나오기가 싫어서 ‘건어물녀’의 모습 그대로다."
-해외 진출에 대한 욕심은 없나?
"나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성유리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활동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 필요한 것 같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그런 환경에서 처음부터 도전해 보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일본이나 영어권에서 작업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 외국어 공부를 하려고 한다."
조이뉴스24 정명화기자 some@joynews24.com 사진 김현철기자 fluxus19@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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