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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기자가 기억하는 박찬호 ① "그렇게 빠른 공은 처음이었다"


[정명의기자] 오릭스의 '코리안 특급' 박찬호를 취재하러 그의 첫 등판일인 15일에 맞춰 일본 효고현으로 향했다. 박찬호는 15일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위치한 고시엔구장에서 라쿠텐을 상대로 정규시즌 첫 선발 마운드에 올랐다. 6.2이닝 3실점으로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지만 팀 타선 침체로 아쉽게 패전투수(오릭스 2-3패)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2년만에 다시 도전하게 된 '풀타임 선발'로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는 충분한 성적이었다.

박찬호를 취재하면서 일본 기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 우연히도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초년병 시절 LA 다저스의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기자 두 명을 알게 됐다. '산케이스포츠'의 오릭스 담당 기세 마사요시 기자와 '닛칸 스포츠'의 데라오 히로카즈 편집위원이었다. 이 베테랑 두 기자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박찬호의 LA 다저스 시절을 떠올리며 한 목소리로 "굉장히 빠른 공을 던지는 대단한 선수였다"고 회상했다. 한국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박찬호의 당시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그랬던 박찬호가 지금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첫 등판은 1994년, 1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박찬호의 야구 인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셈이다.

◆'아시안 콤비' 기대감에 일본도 들썩

기세 기자는 박찬호의 역사적인 메이저리그 첫 선발 등판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당시 상황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노모의 취재를 위해 가 있다가 박찬호가 던지는 것을 처음 봤다. LA 다저스의 디비전시리즈 진출이 결정된 상황, 다저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승패에 큰 의미가 없는 경기였고 유망주였던 박찬호가 선발로 등판했다."

박찬호의 등판 기록을 찾아본 결과 기세 기자의 말은 정확했다.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1995년 대망의 첫 선발 마운드에 오른다. 10월 2일(한국시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와의 경기, LA 다저스의 시즌 최종전이었다.

"굉장히 빠른 공을 던져 모두가 놀랐다. 내 기억으로는 158, 159km를 던졌던 것 같다. 그렇게 빠른 공은 본 적이 없었다. 일본에 '대단한 한국 선수가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회사에서는 아시안 콤비(박찬호와 노모)가 디비전 시리즈에 함께 나서는 것이 아니냐고 기사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 박찬호는 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았고 회사나 나나 실망을 금치 못했다."

최근 한국 프로야구 LG 트윈스에 입단한 용병 투수 리즈는 162km의 직구를 던지는 것으로 입단 전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어느 나라 야구든 투수의 강속구는 팬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당시 박찬호가 그랬던 것처럼. 리즈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받고 있는 주목을 박찬호는 세계최고의 선수들이 모인다는 메이저리그에서 처음부터 받았던 셈이다.

박찬호는 첫 선발 등판이던 샌디에이고전에서 3이닝 1피안타(홈런) 1실점을 기록했다. 사사구는 하나도 내주지 않았고 5타자를 연속해서 탈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메이저리그 진출 초기까지 고수하던 하이킥(와인드업 시 다리를 높이 들어올리는 것)을 포기한 것도 이 맘때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박찬호는 디비전 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LA 다저스는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3연패를 당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그 해 13승 6패를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올랐던 노모 히데오와 '아시안 콤비'로 활약해주길 기대했던 것이 안타깝게도 무산되고 만 것이다.

◆'토네이도' 노모 vs '코리안특급' 박찬호

기세 기자는 1995년 특파원으로 LA 다저스를 취재하며 스프링캠프 때부터 박찬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아시아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뛴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노모가1995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일본 각 언론사들도 현지에 특파원을 파견하기 시작했고, 일본 취재진들은 자연스럽게 박찬호의 존재를 알게 됐다.

기세 기자는 "노모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먼저 와 있던 박찬호와 캠프 때부터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 같았다. 물론 영어로 말이다"라며 "그러나 노모가 그다지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라 두 선수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했는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전했다.

데라오 위원 역시 "본격적인 메이저리그 진출을 알린 선수가 일본에서는 노모였고 한국에서는 박찬호였다"며 "서로 좋은 경쟁 상대이자 라이벌이었다"고 한 팀에서 뛰었던 노모와 박찬호가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고 했다.

각자의 고국에서 큰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두 선수의 출발은 노모가 좋았다. 노모는 이미 일본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던 선수인 만큼 1995년 13승, 1996년 16승, 1997년 14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박찬호는 마이너리그에서의 조련을 거쳐 1996년 5승을 거두며 가능성을 보이더니 1997년 14승을 거두며 팀의 확실한 선발투수로 자리잡았다.

이어 박찬호는 1998년 15승을 올리며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후 3년간 13승-18승-15승을 올리며 기세를 드높였다. 그러나 하락세에 접어든 노모는 1998년 LA에서 방출당한 뒤 이곳저곳을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만다. 공교롭게도 박찬호가 에이스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점이 노모가 몰락하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노모가 다저스를 떠나면서 박찬호는 팀의 에이스가 됐다. '아, 노모가 박찬호한테 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노모의 상태가 안좋은 시기였고 박찬호는 이제 막 가능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젊은 선수였다."

당시를 떠올리던 기세 기자의 말이다. 16년 전 기억을 떠올리던 기세 기자는 추억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당시를 회상했다.

조이뉴스24 지바(일본)=정명의기자 doctorj@joynews24.com 사진 김현철기자 fluxus19@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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