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는 데뷔 21년차 배우 이병헌의 첫 사극이다. 비중이 한 쪽으로 명확히 기울긴 하지만 180도 다른 두 캐릭터를 한꺼번에 연기한 첫 1인2역 도전작이기도 하다. 극중 이병헌은 자신을 해하려는 궐내 세력 사이에서 두려움에 떠는 조선의 왕 광해와 그를 빼다박은 얼굴로 왕의 대역을 맡게 되는 천민 하선을 모두 연기했다.
사극과 1인2역. 명실공히 연기력과 스타성을 고루 갖춘 이 '슈퍼스타'가 한 번에 두 가지 도전을 소화했다. 무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7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이병헌에게 영화의 완성본을 처음 본 날의 기분을 묻자 "정말 긴장이 됐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어쩔 수 없나보다"며 웃어보였다.
"영화가 끝나기 30~40분 전, 일반시사가 열리는 극장에 들어가서 관객들 반응을 봤어요. 웃음 포인트가 많은 초반 반응은 보지 못했지만 상영 시간이 꽤 긴데도 휴대폰을 꺼내는 관객들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사실 배우들은 시사회에서 사람들이 영화를 재밌어하는지 아닌지를 그런 걸로 짐작하거든요.(웃음)"
이병헌이 사극에 처음으로 도전한다고 해서 그의 연기가 겉돌 것이라 걱정한 사람들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유독 깊고 안정된 목소리, 기민한 촉을 한데 모아둔 듯한 연기력은 장르를 떠나 관객들의 믿음을 사게 된 지 오래다. 그러나 '광해'의 시나리오를 읽은 이병헌이 바로 출연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를 관통하는 재기와 웃음기를 "수위를 넘지 않는 느낌으로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단다.
"'광해'가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메시지를 가벼운 터치로 푼다는 건 참 좋은 부분인데, 같은 이유로 걱정도 되는 거에요. 자칫 수위를 넘으면 유치한 코미디가 될 수 있으니까요. 슬랩스틱도 많고요. 제가 수위를 넘지 않고 세련되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오래 고민했어요. 단지 사극이라서 고민하진 않았죠. 어차피 재밌는 시나리오였으니까요"
이병헌은 영화 공개를 앞두고 출연자들이 으레 입에 담곤 하는 '홍보성 멘트'를 유독 어려워하는 배우다. 지난 4월 열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지아이조2' 국내 기자간담회는 그런 그의 성향을 스스로 고백한 자리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낯이 뜨겁다"며 끝내 판에 박힌 홍보성 대사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취재진이나 관객들에게 홍보 멘트를 쉽게 내뱉지 않는 데에 남다른 철학이 있는 것인지 묻자 그는 민망한듯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영화 많이 봐주세요' '사랑해주세요' '기대해주세요' '재밌어요' 같은 말을 잘 못하겠더라고요. 관객마다 취향이 다르니 재미 없어 할 분들도 있을 테니까요. '제가 볼 땐 재미있더라고요'라고는 해본 적 있어요.(웃음) '재밌다'고 함부로 말하는 건 정말 홍보성 멘트 같잖아요. 어떤 면에선 융통성이 없는 거죠. 평소에 까불고 장난칠 땐 융통성이 있는데, 그런 면에선 고지식한 편이에요."
'지아이조' 시리즈에서 최고 인기 캐릭터 스톰쉐도우를 연기한 데 이어 그는 브루스 윌리스와 다시 호흡을 맞추는 영화 '레드2'에 출연한다. 쉼 없이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그지만 일거수일투족이 화려하게 조명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병헌은 "미리 뭔가를 포장하고 싶지 않다"며 영화가 공개되기 전 그의 행보에 지나친 관심이 쏠리는 것을 불편해했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싫어요. 미리 뭔가를 포장하고 싶지 않거든요. '지아이조'에 출연하고 나서, 할리우드 활동에 대해 왜 더 크게 이야기하고 다니지 않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왜 그렇게 조용히 왔다갔다 하느냐고요.(웃음) '멋지게 하고 올게요'하고 보여주는 것도 물론 멋지지만, 완성되고 나서 딱 보여주는 편이 저는 더 좋더라고요. 완성된 작품을 보여준 뒤 재미가 없다면, 그 전에 제가 뱉은 말들이 스스로 민망해질 것 같거든요. (제 말에) 믿음이 덜 갈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의 이름 뒤에 어김없이 따라붙는 '월드스타'라는 호칭 역시 부담스럽긴 매한가지다. 이병헌은 "'이제 월드스타 대열에 확실히 올라섰다'와 같은, 미리 자랑하는 듯한 뉘앙스의 기사들이 내 어깨를 누른다"고 고백했다. "'너 이 기사에 쓰인대로 딱 맞게, 잘 해야 돼'라는 압박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아직까지, 대중은 이병헌의 연기력에 실망감을 표한 적이 없다. 작품의 흥행력이 구설에 오른 적은 있어도, 그것이 이병헌의 연기 탓으로 귀결된 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이병헌의 모습은, 되려 입에 발린 홍보 멘트가 필요 없을만큼 흡인력있는 연기를 펼쳐온 그의 연기 역사와도 제법 맞아떨어지는듯 보였다.
이병헌·류승룡·한효주·김인권·장광이 출연하고 추창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광해'는 오는 13일 개봉한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최규한기자 dreamerz2@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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