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2000년대 초, 투명한 피부와 까맣고 큰 눈동자, 여리여리한 체형에 조곤조곤한 말씨를 지닌 한 여배우가 몇 편의 작품들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영화 연애소설(2002), '클래식'(2003), '내 머리속의 지우개'(2004), KBS 2TV 드라마 '여름향기(2003) 등을 통해 그야말로 청순미의 대명사가 됐다. 배우 손예진의 이야기다.
다른 시도도 많았다. 영화 '작업의 정석'(2005)에선 미모의 여자 카사노바로 변신해 색다른 매력을 드러냈다. SBS 드라마 '연애시대'(2006)에선 수수하고 평범한 이혼녀로 분해 시청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었다. 범죄 액션 영화 '무방비 도시'(2008), 방송 기자들의 치열한 삶을 그린 MBC 드라마 '스포트라이트'(2008), 재난 영화 '타워'(2012), 스릴러 영화 '공범'(2013)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갔다.
이렇게나 부지런한 필모그라피도 흔치 않다. 천상 보호 본능을 일으킬 것만 같은 두 눈이 때로는 장난기로, 때로는 야망으로 빛났다. 배우 손예진은 진화하고 있다.
변치 않은 미모 덕인지 여전히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청순'이지만, 손예진은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화 '해적: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여자 해적 여월 역을 연기했다. 생애 첫 액션 연기를 소화하며 말이 아닌 고충을 겪었을 테지만, 그 모든 기억을 손예진은 웃으며 풀어놨다.
'해적'은 조선의 옥새를 삼켜버린 귀신 고래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내려온 산적 장사정(김남길 분)이 여자 해적 여월(손예진 분)과 함께 바다를 누비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손예진이 연기한 여월은 건장한 남성 해적들 사이에서도 결코 기 죽지 않는 소단주다. 이를 위해 손예진은 와이어 액션은 물론, 연검을 활용한 화려한 검술 연기에도 뛰어들었다.
손예진은 "가장 걱정했던 면이 첫 액션, 심지어 사극이었다는 점"이라고 고백한 뒤 "해적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생소하기도 했으니 제겐 큰 도전이었다"며 "연기보다 외형적인 면에서도 부담이 컸다. 옷, 헤어, 메이크업 등 모든 면에서 우리가 새로 만들어 나가야 했다. 찾을 수 있는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알렸다.
이어 "액션의 경우 어설퍼보이면 어떡하나 싶었다"며 "나름대로 운동 신경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액션 연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드라마를 끝내고 한 달 후 바로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고 돌이켰다.
어느덧 데뷔 15년차에 접어든 그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하면 할수록 책임감이 많이 생긴다"며 "더 잘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계속 발전해야 한다는,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고 말을 이어 간 손예진은 "그런 노력, 뭔가 조금이라도 진화하려고 하는 모습을 예쁘게 봐주셨으면 한다. 계속 도전하고 있는 배우라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배우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해적'은 드라마 '추노' '도망자 플랜비' 등의 극본을 쓴 천성일 작가와 영화 '댄싱퀸' 이석훈 감독의 만남으로 기대를 얻고 있다. 배우 김남길·손예진·유해진·김태우·이경영·김원해·박철민·이이경·설리 등이 출연한다. 오는8월6일 개봉한다.
이하 손예진과 일문일답
-완성된 영화를 첫 관람했다. 어땠나?
"간담회를 준비하느라 마지막 장면을 못 보고 나왔다. 벽란도 신이나 물레방아 신, 고래와 등장하는 장면의 경우 물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연기했다. 원래 고래와 여월의 만남은 없었다. 감독이 여월이 어린 시절 어린 고래를 구해준 사연이 여월이 성장힌 후 물 속에서 고래와의 교감으로 이어지면 좋겠다고 해서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애착이 가는 장면이었고 어떻게 나올지 많이 궁금했다. 고래 CG가 정말 어렵다. 웬만한 기술로는 자칫 가짜같아 보일 수 있다. 극 중 우리가 잡았던 것은 귀신 고래다. 실제 귀신 고래는 그렇게 생겼다더라. 우리가 생각하는 범고래와는 다르다고 한다. 흉물스러워보이면 어떡하나 고민했다. 고래의 눈동자에서도 연민이 느껴지게 했다. 동물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고래의 이야기도 잘 다가가길 바랐다. 그런 면이 마음에 들었다."
-액션 연기에 첫 도전했다.
"가장 걱정했던 면이 첫 액션, 심지어 사극이었다는 점이다. 해적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생소하기도 했으니 제겐 큰 도전이었다. 연기보다 외형적인 면에서도 부담이 컸다. 옷, 헤어, 메이크업 등 모든 면에서 우리가 새로 만들어 나가야 했다. 찾을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 액션의 경우 어설퍼보이면 어떡하나 싶었다. 나름대로 운동 신경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액션 연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드라마 끝내고 한 달 후 바로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검을 잡는 것 자체가 쉽지 않더라. 이제까지 10여 년 연기를 하며 카메라 앞에서 여성성이 짙은 연기를 해 왔다. 이 경우는 가만 서 있어도 굉장히 당당해 보여야 했다. 카리스마 빛나는 두목이어야 해서 압박이 컸다. 키가 큰 편도 아닌데 덩치 있는 배우들 사이에서 힐을 신을 수도 없지 않나.(웃음) 시간이 많았다면 액션도 훨씬 잘 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할수록 노하우가 생기더라. 너무 첫 도전이라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그런 개인적인 욕심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감독과 무술 감독이 최대한 멋지게 편집해주셨다."
-시나리오를 읽고 꼭 출연하겠다는 생각을 했나?
"읽은 것은 예전인데 너무 웃기더라. 산적과 해적의 이야기, 귀신 고래가 옥새를 삼켰다는 설정도 그랬다. 예산이 어마어마한데 만들어질 수 있을까, 투자가 될까 싶었다. 한국에서 어드벤쳐물이 많지 않았는데, '해적'은 '인디아나존스' '캐리비안의 해적' 같기도 했다. 캐릭터도 여자 해적이라니 너무 신선했다. '나랑 어울릴까?' 하는 생각은 당연히 했지만 내가 안 하고 다른 누군가가 하면 배가 아플 것 같았다. 또 만나기 확실히 힘든 캐릭터일 것 같았다. 궁금해서 도전하게 됐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기보다 궁금함이 컸다."
-손예진이 본 여월은 어떤 인물인가?
"약간의 슬픔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영화는 유쾌하고 코믹한 영화다. 오히려 장사정은 아픔을 겪고 산적이 된 인물인데 여월의 경우 사연이 많이 보여지지 않는다. 어릴 적 이야기가 살짝 나오지만 크게 감정을 담지 않는다. 항상 여자로서 남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많은 것을 감추며 살아온 인물이다. 그냥 강하기만 해 보이는 것보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에서 여월의 감정, 과거가 보이는 면이 거의 없으니 내가 그것을 가져가지 않으면 캐릭터가 비주얼만 보이는, 단선적 인물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고독한 두목의 모습을 염두에 뒀다."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유일한 여성 주인공이다.
"김남길과 유해진이 거의 웃음을 주도하고 있으니 다른 영화와 차별성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남자 영화가 많아 여배우로서 조금 그렇기는 하다. 파트너들이 둘 다 남자인 영화들이다. 여자 배우들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다. 우리 여배우들이 더 많이, 닥치는대로 더 좋은 영화들을 빨리 많이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웃음)"
-김남길은 손예진과 로맨틱 코미디로 만나고 다시 싶다고 말했다.
"김남길이 워낙 웃기다. 너무 웃겨서 막상 찍을 땐 기운이 빠지기도 했을 것이다. 에너지를 비축해놔야 할텐데 계속 웃기니까.(웃음) 로맨틱 코미디에서 만난다면 정말 웃겼을 거다. 서로 몸을 불살라 웃기겠다고 했을 것이다. 후반부 알콩달콩한 모습은, 우리가 전작에서 호흡을 맞춰봤고 김남길의 성격에 그런 면이 있기 때문에 짧지만 임팩트가 있던 것 같다. 굉장히 초반에 찍은 분량인데 처음 만나는 배우들이 그런 장면을 찍었다면 잘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 작은 공간에서 작은 눈빛과 표정으로 재미와 살짝 로맨틱한 단계를 오가는 부분이다. 한 번 호흡을 맞췄기 때문에 좋았던 것 같다."
-김남길과 전작에서 만났다는 면에서 오히려 걱정이 됐을 수 있다. 전혀 다른 무드의 작품이다.
"전혀 상의는 하지 않았다.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다. 김남길의 말투는 원래 그렇디. 제가 남자같고 털털하고 김남길이 여성적이고 수다스러운 편이다.(웃음) '첫 테이크에서 그렇게 갔다면 이번엔 이렇게 가자'고 이야기하는 식으로 연기 호흡이 잘 맞았다. 진지한 연기를 할 때의 호흡은 별로였을 수 있다(웃음)"
-홍일점일 뻔 했는데 다행히도 설리가 여자 캐릭터다.
"거의 모든 장면이 배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촬영 후 모니터를 잘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에 올라갔다 내려오려면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니까. 배 위에 난로를 놓고 추위에 떨며 힘들게 외롭게 있었다. 설리도 너무 고생했고 신정근 선배도 그랬다. 형제들 같기도 했다. 혼자 찍었다면 못했을 것 같다."
-극 중 설리가 연기한 흑묘는 여월을 존경하며 계속 따라다니는데, 실제 성격은 어떻던가?
"귀엽다. 그 나이 또래 모습이나 성격이 있고 순수함도 많다. 선배들이 많으면 나름대로 얼마나 신경쓰이는 면이 많았겠나. 민폐를 끼치기 싫은 순간이 많았을텐데 우리가 이러저러한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흑묘가 엄청난 무술을 가진 역이 아니라 조금은 어색해도 캐릭터와 맞았을 것이다. 흑묘와 여월의 관계에 뭔가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흑묘는 여월을 유일하게 언니라고 부르지 않나."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이 있다면?
"처음에 소마(이경영 분)를 칠 때, 그 순간이 첫 액션 촬영이었다. 고생이 많았다. 대역 배우 분이 처음에 이경영 선배와 합을 맞추는 장면에서 이마가 찢어졌다. 굉장히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는 여자 대역 배우였다. 칼을 휘두르는 순간 탁 맞아버렸다. 여자 얼굴이라 너무 걱정을 했다. 스턴트, 무술 팀들과 이렇게 호흡을 많이 한 경험이 처음이다. 그들의 노고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이 처음이지 않나. 굉장히 마음이 짠했다. 바로 병원에 갔는데 이경영 선배는 얼마나 마음이 겁났겠나. 조심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액션을 멋지게 연기하려면, 우리 같은 배우들이 칼을 멋지게 쓰는 데에 한계가 있으니 어렵다. 서로 다치게 하면 일주일, 열흘을 쉬어야 한다. 모든 것들에 대한 압박,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너무 추웠고 어려웠고 힘들었던 첫 액션 촬영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는 점에서 큰 경험이었다. 저는 담이 크게 두 번 온 것을 빼면 다친 적은 없다. 계속 몸이 결린 상황이었다. 운동 선수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다시 액션 영화 섭외가 들어오면?
"굉장히 열심히 준비하고 긴 시간 연습하고 싶다. 한 번 해 보니 노하우가 생겼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쁜 외모를 가려야 했는데?
"사실 더스트를 많이 칠했는데 너무 심해보였나 보더라. 오히려 멋져보여야 하는데 땟국물이 있으면 몰입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너무 떡칠을 해서 지워달라고 했었다.(웃음) 처음엔 우리에겐 반사판도 없었으니 예쁘지 않게 나왔을텐데 이후 작업을 해주신 것 같다."
-드라마 '대망'에서 남장여자 연기를 했었다.
"당시엔 귀여운 역이었다.(웃음) 사실 이번 영화에선 너무 못생기게 나올까 걱정했었다. 스모키 화장을 진하게 하면 원래 부어보이게 나오는 편이다. 추워서 얼굴도 얼어 있었다. 대사가 별로 없어 다행이지, 대사가 많았으면 입술 모양이나 얼굴 근육이 예쁘지 않게 나왔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 모두에게 어려웠다. 스태프들도 여월의 외형에 대해 매일 고민했다."
-김남길과 바다에서 소변을 보는 장면에서 웃음이 많이 터지더라.
"그 장면에서 많이들 웃을 줄 몰랐다. 시나리오에 원래 있던 장면인데, 억지 웃음으로 만들지 않고 먼 산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던 것이 그런 반응을 불러온 것 같다."
-여전히 청순미의 대명사다.
"청순한 역할들을 초반에 굉장히 많이 했다. 그게 10년을 간다. 뭐 그렇게 청순하게 한 것도 없는데.(웃음) '공범'도 있고 '타워'도 있었다. 요즘 멜로는 많이 만들어지지만 '클래식' 같은 그런 멜로를 찾을 수 없다. 이후로 '작업의 정석' '무방비도시' 등 많은 작품을 거쳐도 끝까지 청순이 부각되는 면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이미지인 것 같아 깨고 싶진 않다. 캐릭터를 다양하게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다. 이미지에 국한돼 연기하는 생각을 안 해봤다.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어찌보면 여자 배우에게 액션 연기, 강한 역할을 할 기회가 많지 않다. 이번엔 첫 도전이어서 부담이 됐던 셈이다. 저도 안 해본 강한 연기라 어색해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무한도전' 출연 이후 반응도 뜨거웠다.
"제 평소 모습을 아는 분들은 굉장히 재밌어했고 모르는 분들은 굉장히 놀라워했다. 그런 반응을 직접 들을 일은 없지 않나. 예전이라면 예능에는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지금도 다른 예능에 나가 내 이야기를 해서 웃기려는 자신은 없다. 월드컵, 축구팀을 응원하러 간다는 면에서, 제가 파이팅이 넘치는 면이 있다. 보기와 다르게 게임 하는 것, 응원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언제 평생 브라질에 가서 축구를 볼까 싶었다. '무한도전'의 팬이기도 했다.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예능인 만큼 내 의도와 다르게 편집이 될 수도 있으니 걱정을 하긴 했다. 요즘 워낙 배우들의 말 한 마디로 화제가 되지 않나. 그런데 다녀오니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의 느낌이 들더라. 멤버들과 정도 많이 들었다. 배우들은 외로운 작업을 많이 하게 되는데, 재밌게 같이 어울리며 할 수 있어 좋았다. 물론 멤버들은 재밌음을 만들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저는 즐기기만 하면 됐던 출연이었다. 그런 계기들로 뭔가가 넓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가?
"하면 할수록 책임감이 많이 생긴다. 더 잘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계속 발전해야 하지 않나.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그런 노력, 뭔가 조금이라도 진화하려고 하는 모습을 예쁘게 봐주셨으면 한다. 계속 도전하고 있는 배우라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배우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박세완기자 park90900@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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