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오차장은 결국 장그래를 출중한 상사맨으로 만들었다. 원인터내셔널의 '고졸 낙하산', 2년 계약직 장그래를 자신의 사업체에 불러들여 다시 길을 열어 줬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상사, 꿈 같은 상사 오차장의 결정은 '미생'의 판타지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20일 방영된 '미생'(극본 정윤정/연출 김원석)의 마지막화에서는 중국 태양열 사업과 관련해 회사에서 물러난 오차장이 새로운 사업체를 꾸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오차장은 입사 후 2년이 지나 계약 기간이 만료된 장그래를 자신의 회사에 데려왔다. 사직 후에도 난처할지 모를 장그래의 입장을 걱정했던 오차장은 비로소 마음의 짐을 던듯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미생'은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이미 완결이 난 웹툰의 서사와 드라마의 전개가 상당 부분 겹치는 만큼, 그 갈등 구조와 결말 역시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미생'을 향한 관심과 몰입이 이토록 뜨거울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그 안의 일원으로 복무하는 개인의 삶을 이제껏 없었던 시각으로 그려낸 덕이었다.
낙하산으로 원인터내셔널에 입사한 주인공 장그래(임시완 분), 그와 함께 신입 생활을 시작한 세 동기들의 성장기는 통찰력 있는 원작의 메시지와 버무려지며 뜨거운 공감을 샀다. '현실에 없는 상사 오차장, 현실에 없는 계약직 장그래'라는 반응은 현실 속 직장인들의 팍팍한 삶을 해갈하는 판타지 드라마로서 '미생'의 존재감을 입증했다.
'미생'의 판타지, 장그래는 선택된 1인이다
최근 방영된 '미생'의 에피소드, 최전무(이경영 분)가 지시한 중국 태양열 사업 아이템을 받아들게 된 영업3팀의 이야기는 원작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중국과 사업 관계를 맺으며 '꽌시'를 해야 하는 상황, 중간 관리자가 부재한 상대 조직, 턱없이 적어진 사업 마진 등 미심쩍은 면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차장(이성민 분)은 몇 가지 이유로 '그답지 않은' 이 사업에 몰두했다.
오차장의 결정은 몇 년 치 실적을 한 번에 쌓을 수 있는 사업의 규모 때문만은, 애증 비슷한 관계를 이어 온 최전무의 요청이어서만은 아니었다. 팀의 미미한 존재감 탓에 번번이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김대리(김대명 분)의 미래를 위해서이자, 정직하게만 살아온 자신의 삶이 모두를 위해 옳은지를 고민하게돼서였다. 하지만 드라마의 서사에서 비춰진 가장 임팩트 있는 목표는 따로 있었다. 계약직으로 입사했지만 제 몫을 충실히 하며 팀의 식구가 된 막내 장그래를 정규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차장의 결단, 불안한 사업을 향해 뒤도 보지 않고 달리려던 그의 모습은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 일과 삶의 가운데서 치열하게 지켜온 가치관이 빠르게 무너져서만은 아니었다. 아끼는 부하 직원을 위해 위험천만한 프로젝트의 중심에 선, 결국 그로 인해 자리를 정리해야 했던 오차장의 모습은 역시 현실보단 판타지인 '미생'의 단면이었다.
장그래를 정규직으로 만들기 위해 내달리기 시작한 오차장의 모습은 함께 일해 온 동료를 향한 인간적 연민 쯤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탕비실에서 마주친 계약직 여직원들이 장그래를 가리켜 "저 사람도 계약직"이라고 뒷말을 하는 장면, 이를 본 오차장이 부러 큰 목소리를 내며 겸연쩍어한 장면도 그렇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최면적 장치로서 드라마의 역할을 환기시킨다. '귀인' 오차장과 함께인 장그래는 '선택된 1인'이다. 말 많던 탕비실의 여직원들을 향한 오차장과 시청자들의 힐난은 엄밀히 이 여직원들과 같은 계약직 사원인 장그래를 뭔가 특별한 드라마 속 주인공으로 만들고 말았다. '미생'의 판타지와 TV 밖 현실 간 낙차는 이 한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그려졌다.
'완생의 길', 남겨진 고민
계약직 장그래의 고민을 그리는 데 많은 줄기를 할애한 '미생'이지만, 공교롭게도 비정규직이라는 채용 시스템 자체에 대해선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MBC 드라마 '신입사원', 혹은 KBS 2TV 드라마 '직장의 신'과는 확실한 차이다.
장그래의 계약 만료를 앞두고, 동료들은 높은 실적을 기록했던 그를 정규직으로 만들기 위해 그룹 차원의 논의까지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그래는 끝내 원인터내셔널의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끝엔 새로운 회사에 장그래의 자리를 만들어두고 그를 기다린 오차장이 있었다. '미생'의 서사에는 비정규직 채용 시스템을 향한 유의미한 시각이 끼어들 틈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 정체성이 주인공에게 숱한 비애감을 안겨줬다 해도 마찬가지다. 오차장이라는 '마스터 키'가 장그래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한.
인사팀을 찾아가 비정규직 출신의 정규직 채용 전례를 묻던 오차장의 목소리는 오로지 장그래만을 위한 것이었다. 오차장은 현실에 없는 상사고, 유사 아버지에 가까운 오차장의 존재 없이는 장그래를 통해 구현되는 판타지 역시 애초에 불가능하다. '미생'에 몰입할수록, 현실의 팍팍함은 살갗을 엔다.
현실을 세밀하게 재현해 깊은 공감을 주는 드라마와 판타지를 대리 실현하는 드라마가 별개의 것으로 구분될 수는 없을테다. 빼어난 디테일과 기시감을 안기는 갈등 구조는 공감을 바탕으로 '미생'을 인기 드라마로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미생'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판타지의 영민한 재현이었다. 뜨거운 공감과 심취를 넘어, '미생'은 좁혀지지 않는 현실과 환상 사이의 거리를 시사한다. 물론 이는 '막장'이 아니고서야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이 말 안 되는 현실의 냉혹함 탓일 수도 있다.
판타지를 그린 드라마로서 '미생'은 분명 미덕이 있는 콘텐츠다. 그러나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의 끝에, 고민은 오롯이 남는다. 오차장을 만나 든든한 지지를 얻었던 장그래, 그리고 애초에 없었던 오차장을 꿈꾸며 '미생'의 삶을 이어가야 하는 시청자들 사이의 간극이다. 호명되지 않은 수많은 '미생'들에게, '미생'은 곧 깨어질 꿈이었다.
'미생'이 그린 결말이 '완생'을 향한 희망인지, 살아도 살아도 다 살아지지 않는 숙명적 '미생'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이제 남겨진 것은 '미생' 밖 세상을 헤쳐가야 할 현실의 장그래들이다. 전쟁터든 지옥이든, 뭐가 됐든 녹록지 않은 삶. 장그래가 되지 못한 수많은 장그래들은 오늘도 각자의 '미생'을 산다. '버티다' 보면 '이길' 날이 올지, 판타지 속 상사 오차장의 잠언이 정말로 유효한 것인지를 끝없이 되물으면서.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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