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 이상이다. 특히 외국 유명팀과의 국제 경기는 경제적 부가가치를 중요하게 따지는 '스포츠 이벤트'라는 말로 연결된다. 야구를 통한 스포츠 마케팅은 여전히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큰 관심사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대중적인 이벤트를 통해 다양한 마케팅 효과를 보자'는 시도는 58년 전부터 있었다. 6.25 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불과 5년 뒤인 1958년 대한민국 최초의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이 땅 서울에서 열렸다. 당대 메이저리그 최강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한국을 찾아 친선경기를 펼친 것이다. 이 경기는 스포츠 경기 이상의 의미를 여러가지 면에서 내포하고 있다.
◆'백상' 장기영의 대형 기획
이 대회를 소개하기 위해선 '백상' 장기영을 빼놓을 수 없다. 1954년 한국일보를 창간한, 훗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IOC 위원 등을 역임한 바로 그 인물이다. 장기영은 언론 시장에 갓 진출한 한국일보를 홍보하기 위해 대형 이벤트를 기획한다. 이것이 1958년 지금은 사라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세인트루이스 초청경기다. 앞서 1922년 메이저리그 선발팀이 서울(당시 경성) 용산 만철구장에서 친선전을 펼친 적이 있는데, 이후 36년만에 열린 초대형 이벤트다.
전쟁의 후유증이 여전한 당시 상황에서 메이저리그 단일 팀을 초청할 수 있었던 데에는 행운도 작용했다. 당시 시즌을 마친 세인트루이스는 필리핀을 방문한 뒤 일본 오키나와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장기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세인트루이스를 서울로 불러들인 것이다. 카디널스 선수단을 태우고 마닐라 공항을 출발한 CAT 항공은 10월21일 오전 11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프레드 허치슨 감독을 비롯해 당시 빅리그 최고 1루수였던 스탠 '더 맨' 뮤지얼, 투수 린디 맥대니얼, 포수 핼 스미스 등 유명 선수들이 포함돼 있었다. 장기영 사장을 비롯해 이홍직 대한야구협회장, 선우인서 전서울 단장, 금철 섭외위원 등이 공항에서 이들을 영접했다.
◆'최강의 올스타' 전서울군
그렇다면 세인트루이스와 맞붙은 팀은 어디였을까. 카디널스가 내한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이들과 맞붙은 '우리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적은 편이다. 카디널스의 '파트너'는 당시 한국의 최정예 선발팀이었다. 당시 한국 야구에선 군팀의 전력이 가장 좋았고 지명도도 높았다. 육·해·공군 및 한운(韓運) 등에서 선수 26명을 뽑아 '전(全)서울군(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야구의 올스타팀이었다.
선수단 면모가 무척 쟁쟁했다. 제3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한태동(韓泰東), 김양중(金洋中), 서동준(徐東俊)과 신인 에이스 구상문(具相文)이 마운드를 책임졌다. 수비진에는 1루수 김정환(金定煥), 2루수 이기역(李起驛)을 중심으로 육·해군의 신인과 노장들이 선발됐다. 외야에는 박현식(朴賢植, 전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장태영(張泰英), 허정규(許正奎) 등 강타자들이 포진했다.
세계최강팀과 일전을 벌이게 된 전서울은 비장한 각오로 합숙훈련까지 실시했다. 선수단은 그해 10월 15일부터 서울 시내 청운장(淸雲莊)을 숙소로 잡고 맹훈련을 시작했다. 오윤환 육군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한 연합팀은 중앙고등학교, 서울운동장 등에서 땀을 흘렸는데, 선수들이 코피를 쏟을 정도로 훈련 강도가 대단했다고 한다.
이처럼 공들여 준비한 역사적인 본경기는 10월 21일 오후 2시 35분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36년 만에 방한한 야구 본고장의 프로 선수들을 보기 위해 오전 11시부터 야구팬들이 서울운동장에 속속 모여들었다. 오후 2시가 되자 관중수는 무려 2만여명으로 크게 불어났다. 2시 35분 세인트루이스 선수들이 장기영 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3루 선수 출입구를 통해 그라운드에 나타나자 수많은 관중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이들을 환영했다. 관중 사이에는 미군들도 꽤 있었다.
◆팽팽한 투수전
경기가 경기인 만큼 귀빈들이 다수 참석했다. 대법원장, 주한미국대사, 유엔군총사령관 등이 서울운동장을 찾았고, 이승만 당시 대통령도 관중의 기립박수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안전 그물망 일부를 잘라낸 뒤 그 사이로 포수에게 공을 던졌는데, 이것이 한국 야구 사상 최초의 대통령 시구다.
'플레이볼'이 선언되자 세인트루이스는 1회초 선공에서 1점을 얻으며 앞서 갔다. 수준 높은 빅리그 투수진에 끌려가던 전서울군은 3회말 김희련이 첫 안타를 친 뒤 5회 성기영(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2번째 안타를 기록했을 뿐 상대 투수진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경기는 8회와 9회 1점씩 추가한 세인트루이스가 3-0으로 승리했다. 전서울군은 7회 3번타자 장태영이 볼넷으로 출루한 뒤 도루로 2루를 밟은 것이 유일한 득점 기회였다. 다만 1회 선발투수 배용섭에 이어 등판한 김양중은 기막힌 호투로 경기를 투수전으로 끌고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급히 공항으로 이동한 뒤 예정된 목적지 일본으로 향했다. 이들은 "다시 한국을 찾아 유감없이 경기를 해보겠다"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김포공항 입국 후 출국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7시간 35분.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선수단을 급히 한국으로 불러들인 까닭에 일정이 촉박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입장권 예매제
경기 이외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큰 대회였다.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라고 볼 수 있는 입장권 예매제가 이 경기에서 시행된 것이다. 주최 측은 경기 당일의 혼잡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한국일보 본사, 대한여행사 각 영업소, 미도파백화점, 신신백화점, 동화백화점, 고려악기점 등에서 입장권을 미리 팔았다.
당시 입장권의 종류는 황색, 홍색, 청색, 녹색, 백색 등 총 5가지였으며, 메인스탠드 입장권인 황색표의 가격은 2천원에 달했다. 경기 당일 현장에서 표를 사는 게 당연시되던 당시 상황에 비춰보면 입장권 예매제는 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그만큼 경기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엄청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세인트루이스의 방문으로 한국은 '관람 스포츠'라는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게 됐다. 수준높은 경기를 보면서 즐기는 '여가 선용'의 계기가 됐다고도 볼 수 있다. 대통령 시구에 입장권 예매제, 그리고 관전문화 보급 등 여러모로 한국 체육사에 의미가 큰 이벤트였다.
◆한국 스포츠 마케팅의 뿌리
무엇보다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말로만 듣던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겨룬 국내 선수들에게 '큰 꿈'을 심어준 최초의 경기이기도 했다. 58년 전 급히 마련한 경기가 오늘날 박병호, 강정호, 오승환 등 여러 빅리거들을 배출한 초석이 됐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불과 5년 후 열린 초대형 스포츠 이벤트. 경제력은 크게 부족했고, 즐길 것은 마땅치 않았다. 사실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다. TV를 통한 스포츠중계는 꿈도 꾸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장기영을 필두로 한 주최 측은 기존 한국인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스케일 큰 이벤트를 기획했고, 실제 결과로 나타냈다. 대한민국 스포츠 마케팅은 이 때부터 첫 뿌리를 내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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