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권혜림기자] 무명 배우 송준(남연우 분)은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의 소유자다. 그는 세계적 연극 '다크라이프'의 배역을 따내기 위해 오디션 준비에 한창이다. 트랜스젠더인 주인공 주디를 그려내려 실제 트랜스젠더의 모습을 몰래 촬영하기도 하고, 무용을 전공하는 남동생의 도움을 받아 캐릭터를 표현할 안무를 연습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 이나(홍정호 분)는 길에서 자신을 몰래 관찰하던 송준을 발견하고 화를 내지만, 이내 그에게 마음을 열고 오디션 연습을 돕는다. 클럽에 데려가주는가 하면, 성소수자 공동체에 송준을 초대해 그들을 더 가까이서 이해할 수 있게 조력한다. 친동생 송혁(안성민 분) 역시 아끼는 형을 위해 인물의 감정을 담은 안무를 직접 송준에게 가르친다. 모두의 노력에 힘입어, 송준은 무명으로서는 파격적으로 주인공 주디 역에 캐스팅된다.
송준은 '열린 사람'이다. 시작은 연기를 위해서였지만 성소수자 공동체 모임에도 적극 참여하고, 이나와도 막역하게 지낸다. 호모포비아이면서도 '다크라이프'의 오디션을 본 친구 지훈이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규정하자, 송준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며 성소수자들의 성적 지향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모습은 꽤나 진실해보인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비밀스런 관계를 목격하기 전까지.
영화는 송준이 '다크라이프'의 성공 후 점차 오만하게 변해가는 모습과 동성애를 향한 내면의 혐오를 드러내게 되는 과정을 병치해 그려낸다. 극단의 조연출에게도, 동료 조연 배우에게도 친근하고 예의있던 송준의 모습은 성소수자들을 향해 '열려 있는' 태도를 취해 온 그의 과거와 정확히 호응한다. 옳다고 생각되는 어떤 태도를 자신의 신념이라 믿었던 송준은 그 지독한 자기기만을 끝내 지워내지 못한다.
'분장'(감독 남연우)은 올해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공식 초청된 작품이다. 지난 2013년 초청작이었던 '가시꽃'에서 주인공 성공 역을 맡아 강렬한 연기를 보여줬던 남연우는 독립영화계에서 활발히 활동해 온 배우 겸 감독이다. 이번 작품은 그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성소수자 담론이 보다 대중적인 논의 대상이 된 시점에서, '분장'의 문제의식은 날카롭게 다가온다. 주인공의 갈등을 통해 위선이라는 키워드를 던지며, 스스로를 속여 온 한 남자의 밑바닥을 과감하게 까발린다.
영화를 연출하고 주인공 송준 역까지 맡아 1인2역을 해낸 남연우 감독은 조이뉴스24와 만나 "인간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에 익숙해지는 순간이 많은 것 같다"며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니라고 믿어 온 한 사람이 그걸 인정해야 하는 순간을 그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애초 남연우 감독과 진행하기로 했던 이 인터뷰에는 감독의 제의로 세 명의 배우(우재 역 한명수, 송혁 역 안성민, 이나 역 홍정호)가 합류해 더욱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홍정호는 '가시꽃'에서 남연우와 친구 사이를 연기했고, 한명수는 당시 음향 스태프로 현장을 채웠으니 세 사람은 막역했다. 안성민은 남연우의 연기 제자로 인연을 맺은 사이다. 함께 영화제를 누비며 관객을 만나고 있던 이들과 '분장'의 뒷이야기를 나눴다.
이하 '분장'의 감독 겸 배우 남연우와 배우 홍정호, 한명수, 안성민과의 대화
-영화 속 송준이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호모포비아적 내면을 스스로 속이는 모습은 굉장히 논리적이다. 현실적이라 더 설득력있는 장면인데 어떻게 구상한 신인지 궁금하다.
남연우 : "작년 3~4월에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이야기를 쓰거나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을 좋아했는데, 나만의 세계를 쓰는 일이 재밌더라. '분장'은 어느 술자리에서 목격한 다른 테이블의 논쟁에서 출발했다. 예술을 하는 이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 대부분은 '그게 질문이야?'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나는 잘못된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하니 공기가 싸해지더라. 그 이후 오가는 이야기들을 듣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정말 그들을 이해하는 걸까? 그에 의문이 생겨 적기 시작했다."
-극 중 송혁 역을 맡은 배우 안성민은 무용 실력이 출중하던데, 실제로도 춤을 전공했나?
안성민 : "고등학교 때 발레를 전공했다. 극 중 송혁처럼 콩쿨 경험도 있고 상도 받았었다. 극 중에선 현대무용을 했는데 실제론 발레를 했으니 많은 분들이 안무를 도와줬다."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됐나?
안성민 : "지금은 세종대 연극영화과에 다니고 있는데, 남연우 감독이 입시 연기 선생님이었다. 발레는 전형적으로 포지션이 정해진 춤인데, 내가 생각하는 예술을 표현하는 방식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좋아했다. 표현이 다양하지 않나. 집 앞 연기학원에 갔는데, (남)연우 형이 있었다. 거기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정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너무 멋져서 우상처럼 느껴졌다.(웃음) 선생님이었던 분과 연기를 한다는 게 처음엔 떨렸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주시며 형제 역이니 말을 놓으라고 하시더라. 연우 형은 현장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데 나도 많이 돕고 싶었다. 스태프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나서게 됐다."
-영화의 후반부, 송혁이 송준을 찾아와 절규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신인 배우라고는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는데.
남연우 : "진짜 잘 했다. 연기 톤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이 영화의 단역, 예를 들어 오디션장 복도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역으로 출연한 배우들까지 정말 진짜를 연기해줬다. 그런 면이 다른 영화에 비해 더 사실적인 느낌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안성민 : "형이 많이 믿어줬다. 원래 코치 스타일이 그렇다. '네 생각이 맞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말하며 조금씩 도움이 되는 말들을 해 준다. 그 장면에선 형을 가만히 보는데, 형이 뭘 잘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냥 그런 감정이 들더라.(웃음)"
-배우 한명수는 외모부터 작은 손짓까지 영화 속 인물과 굉장히 잘 어울리더라.
한명수 : "처음엔 강한 남성의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극 중 선생님으로 나오는만큼 친구들에게 더 부드러운 인물로 다가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 친구를 바라보는 마음이나 엄마같은 마음을 그리기엔 부드러운 이미지가 좋을 것 같더라."
-극 중 트랜스젠더 이나 역을 연기한 홍정호는 영화에서와 너무 다른 이미지라 놀랐다.
홍정호 : "관객과의 대화(GV)에 가면 나를 이나라고 소개할 때 관객들이 가장 놀란다.(웃음) 뮤지컬 배우 겸 가수로도 활동 중인데, 뮤지컬을 할 때 여성의 분장은 아니었지만 과한 분장을 해본 적은 있다. 여성으로 보이게 하는 분장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연우 : "홍정호는 배역을 위해 살도 10kg 빼고, 왁싱도 했다. 처음엔 이나 역을 인지도 있는 배우에게 맡기고 싶었다. 배우들의 변화에 쾌감을 느끼는 편인데 한국 배우들 중 그런 많은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 않나. 불안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원래 홍정호는 친구 지훈 역을 연기하려 했었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배역이 이나라고 하더라. 정호가 변신한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 배역을 맡겼다."
홍정호 : "사실 힘들었다. 지방 투어 공연도 해야 했고 살도 빼야 해서 하루에 고구마 하나 반을 먹고 지냈다. 공연에선 내가 누굴 괴롭히는 역이었는데, 마치 내가 괴롭힘을 당해야 할 것 같은 모습이 됐다. 현기증으로 쓰러질 뻔도 하고."
-극 중 이나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 특히 후반부에서 송준을 보며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홍정호 : "노래는 음악 감독님이 만들고, 가사도 그 분이 썼다. 노래는 내가 직접 했다. 아침드라마의 삽입곡으로 쓰였던 '내 사랑 어디에'라는 곡을 부르기도 했다. 이번엔 싱글 음반을 준비 중이다."
-극 중 '다크라이프'를 공연하는 대극장 장면은 규모가 매우 크더라. 독립영화로는 과감한 연출이었는데.
남연우 : "'분장'은 도움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극 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극인데 어설픈 극장으로 보이면 안되지 않겠나.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던 차에 동기가 참여한 '위대한 개츠비' 공연에 가서 극장을 보는 순간, '분장'의 장면들이 막 떠오르더라. 다행히도 학교 동기 형이 무대 감독을 했다고 하기에 극장 측에 부탁해 저렴히 대관했다. 물론 우리 제작비에선 엄청난 비용이었다. 중요한 건 400석을 어떻게 채우느냐였다. 열흘 전부터 다 같이 전화번호부를 뒤져 생전 연락을 안 하던 사람들에까지 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눈도 오고, 평일 오후라 직장인들은 올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밖에선 홍정호와 한명수가 감사 인사를 하고 있고 나는 영화 속 송준처럼 무대에서 객석을 몰래 봤다. 꽉 차 있더라. 혼자 울었다."
홍정호 :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그런 기적이 다시 올까?"
-배우이자 감독, 동료인 남연우에 대해 평가해달라.
한명수 : "열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 열정에 빨려들어가 작업했다. 너무 좋은 사람이다보니 함께 작업하게 돼 즐거웠다. '가시꽃'에서도, '분장'에서도 이런 현장이야말로 영화를 만드는 정말 즐거운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연기를 전공했는데 '가시꽃'에선 왜 음향 스태프로 일하게 됐었는지도 궁금하다.
한명수 : "'가시꽃'의 이돈구 감독이 학교 선배라 오래 알고 지냈다. 현장에 도움을 줄 수 있냐고 하는데 음향을 해달라고 하더라. 할 줄 모른다고 했더니, 그냥 들고만 있으면 된다고 해서 렌탈숍에서 10분 정도 배웠다.(웃음)"
남연우 : "그런데 그게 지금은 역사에 남았다. 보통 영화를 찍고 후시 녹음을 하지 않나. '가시꽃'은 후시를 안 했다."
한명수 : "그래서인지 연기를 전공했는데도 자꾸 스태프 제안이 들어온다.(웃음)"
남연우 : "한명수는 '가시꽃'으로 처음 만났는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배우로서 음향 일을 하는 것,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을 잡아주고 카메라 앞에 오지 않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인데도 기쁘게 작업하더라. 그 때 '우리, 배우로 다시 작업하자'고 했는데, 다행히 그렇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
-영화 속 송준의 모습을 보면, 매우 다른 캐릭터이긴 하지만 '가시꽃' 속 성공의 갈등도 떠오른다. 결국 스스로를 속이고 싶어하는 모습, 자기기만과 단죄의 모티프가 있다는 것도 그렇다.
남연우 : "송준에겐 내가 많이 반영됐다. 배우 역할을 준비할 시간이 많이 필요했는데 (연출을 겸하느라) 만족스럽게 하지 못했다. 나는 변화를 좋아한다. '가시꽃' 작업이 행복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번엔 머리가 터질 것 같더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에 익숙해지는 순간이 많은 것 같다. 나 자신도 그렇다. 분명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만 '아니야, 괜찮아. 난 잘 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며 그게 진짜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익숙해진 사람이 진짜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을 그리고 싶었다. 그건 힘든 일이다. 송준은 끝까지 인정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무대 위에서의 절규가 죄에 대한 벌을 받으려는 행동이 아닌 열연으로 받아들여지고 박수를 받으니, 송준에겐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송준의 위선이 이 영화에선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었다."
-영어 제목은 '로스트 투 셰임(LOST TO SHAME)'인데, 한글 제목과 탁월히 호응한다.
남연우 : "영어 제목은 안성민이 지었다. '분장'에 올드한 느낌이 있어 영어 제목이 중요했는데, 팀 내에서 당선자에게 회를 사주는 포상을 걸고 공모전을 했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송준의 모습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뻔뻔한 위선자의 이미지에 어울린다. 그런데 아직 회는 쏘지 않았다.(웃음)"
조이뉴스24 부산=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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