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끝이 보이지 않는다. '미투(Me Too)' 운동이 문화예술계에 만연했던 성폭력 실태를 연이어 고발하고 있다.
유명 시인 고은을 비롯한 원로 문인들의 성폭력 문화가 최영미 등 여성 시인들의 시와 인터뷰를 통해 알려졌다. 국내 연극계를 대표할만한 '어른'으로 불렸던 연극인 이윤택, 인기 연극 배우 이명행과 배우 조민기 등이 이들에게 실제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수많은 여성들의 폭로 대상이 됐다. 피해자들이 입을 모아 증언한 구체적 정황과 가해자들의 상습성이 대중에게도 크나큰 충격을 안겼다.
지난 14일을 기점으로 가장 큰 논란을 낳은 고발은 유명 연극 연출가 이윤택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밀양을 거점으로 한 연희단거리패에서 오랜 시간 기반을 다지며 활동해 온 그는 극단의 젊은 여성들을 불러 안마를 시키고 특히 자신의 신체 주요 부위를 만지도록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폭행 역시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다. 파장을 넘어 공분을 일으킨 이 사례는 한두 명이 아닌 수 명의 여성들이 직접 고발하며 세간에 알려졌다.
'미투'의 흐름에 동참하며 과거의 끔찍한 기억들을 꺼낸 피해자들은 며칠 간 연이어 나타났다. 극단 미인의 김수희 대표와 같이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며 그의 행동들을 폭로한 피해자가 있는가 하면, 무려 미성년자였을 당시 이윤택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힌 피해자도 있었다.
김수희 대표는 10년 전, 당시 연극 '오구' 연출을 맡은 이윤택 연출가가 "자기 성기 주변을 주무르라고 했다"고 폭로했다. 지난 17일 연희단거리패에서 활동한 A씨 또한 이윤택 연출가에게 두 차례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19일 극단 나비꿈 이승비 대표 역시 "발성연습을 빌미로 CCTV가 없는 곳에서 온몸을 만졌다"고 밝혔다. 인면수심의 행적들에 분노와 비난의 쏠리는 것도 당연했다.
이에 이윤택은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정말 부끄럽고 참담하다"며 성추행을 인정했다. "성폭행은 하지 않았다"라며 "법적 절차가 진행된다면 성실히 수사에 임하겠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성폭행 혐의를 부인하며 숱한 증언들과 다른 주장을 펼친 그의 태도는 또 다른 피해자들의 분노를 불러올 뿐이었다. 지난 20일 이승비 대표는 이윤택 감독의 성폭력 사실을 다시 힘주어 강조했다.
배우 김지현은 이윤택의 기자회견 당시 태도와 발언의 진위를 지적하며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피해 사실을 밝혔다. 특히 그는 임신과 낙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혀 파장이 커졌다. 19일 김지현은 자신의 SNS를 통해 "황토방이란 곳에서 여자단원들은 밤마다 돌아가며 안마를 했고, 저도 함께였다. 그 수위는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 혼자 안마를 할때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2005년 임신을 했다"고 알렸다.
19일 서울연극협회가 이윤택을 제명하고 연희단거리패의 김소희 대표가 극단 해체를 선언했지만, 파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연극배우 겸 연출가 오동식은 19일 진행된 이윤택의 사과 기자회견이 내용부터 표정까지 모두 미리 철저히 예행연습된 결과물이라 알렸다.
하지만 SNS에 게재된 오동식의 글 아래에도 그를 동조자로 언급하는 연극인의 댓글이 달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너무나도 만연하게 퍼져 있던 성폭력 문화에 맞선 '미투' 운동이 또 어떤 가해자를 지목할지 이제 예상도 하기 어렵다.
지난 20일에는 청주대 교수로 재직했던 배우 조민기의 가해 사실들이 학생들의 증언으로 만천하에 공개됐다. 조민기가 학생들을 향해 성적 수치심을 주는 발언들을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주장, 상습적으로 여성 학생들을 오피스텔로 불러 신체 접촉을 했다는 주장이 잇따랐다. 그가 드라마와 가족 예능 프로그램 등을 통해 보다 대중적 인지도를 얻어 온 인물이기에 충격은 거셌다.
이에 지난 21일 충북지방경찰청은 조민기의 여학생 성추행 의혹에 대해 내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지난 20일 조민기가 재직했던 청주대학교 측에 성추행 진상 조사한 내용을 요청했으며, 피해 학생들을 파악해 성추행 의혹 관련 진술을 확보할 방침이다. 조민기는 OCN 드라마 '작은 신의 아이들'에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하차가 결정됐다.
'미투' 운동이 꺼낸 피해자들의 고백은 당혹감을 넘어서는 감정을 안겨왔다. 분노, 혹은 혐오의 감정을 떠올리는 것도 지나치지 않은듯하다. 특히 공연예술의 주된 소비자들이었던 여성 관객들은 자신이 응원하고 지지했던 집단에서 파헤쳐진 이 사건들에 참담함을 고백하기도 한다.
길게는 10여년 전의 사건들까지, 피해 사실이 이토록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데에는 성폭력 사건을 둘러싸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행동과 선택을 책망하는 시선이 큰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피해자들은 성별 권력과 공동체 속 위계 권력이 맞물린 폐쇄적 질서 속에서 철저히 약자였다. 그들의 발언이 더더욱 쉽지 않았던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 연대한 피해자들은 봉인돼있던 피해 사실들을 함께 공개했다. 여기 명백한 사실이 있다. 폭로된 이름들은 가해 주체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성폭력은 문화 속에서 묵인되고 재생산된다. '미투'의 움직임이 향하는 궁극적 목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나가는 일이다. 피해자들의 폭로는 사회 전반에 성 인지적 문화를 뿌리내리는 데 공헌한 역사로 남을 것이다. 남은 것은 처벌과 변화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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