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한번볼래?]'허스토리'★★★★

[조이뉴스24 유지희 기자] 삶의 시계가 일제 치하에 멈춰버린 사람들이 있다. 남은 것은 고통스러운 현재뿐이다. 치유되지 않은 질기고 깊은 상처는 모두의 '역사(history, 히스토리)'에서 지워져야 했기에 끔찍한 과거를 견뎌야 하는 것은 오롯이 혼자의 몫이다. 영화 '허스토리'는 일제 시대 위안부였던, 역사 속에 감춰진 그녀들의 이야기다.

'허스토리'(감독 민규동, 제작 수필름)는 역사상 단 한번 일본 재판부를 뒤흔든, 관부재판 실화를 담은 작품. 관부재판은 지난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23회에 걸쳐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벌인 조선 위안부·정신대 할머니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싸운 사람들의 끈질긴 법정 투쟁이다. 재판에서 일부 승소를 거두고 최초로 배상을 인정받은 작지만 역사의 주요한 재판이다.

'허스토리'는 위안부였던 여성들의 삶을 현재 시점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접근한다. 잠을 자다가도 작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몸서리치거나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는 모습, 위안부였기에 같은 국민에게도 멸시당하는 상황 등은 과거가 얼마나 피해자들의 현재 삶에 깊숙하고 넓게 침투해 있는지를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적 가해-피해 관계에서 피해자에겐 이 문제가 과거가 아닌, 여전히 현재의 문제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기억은 몸에도 문신처럼 새겨있다. 영화는 오로지 할머니들의 내러티브와 신체 일부를 보여주며 극의 중심이 되는 법정 재판 신을 그린다. 칼부림이 낭자했던 흔적, 강제적으로 빼앗겨버린 생식기 등 이들의 신체는 착취당한 과거 피해 사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상징이다. '허스토리'는 극의 절정이 되는 재판 신뿐 아니라 극 전체에서 클로즈업 등을 남발하지 않고 다소 건조하지만 정직하게 이들을 바라본다. 그 자체가 비극이기에.

'허스토리'의 가장 큰 미덕은 'her'의 확장이다. 영화는 더 큰 권력에 휘둘린 개인들을 단지 '여성'으로 한정 짓지 않는다. 민족이라는 구분짓기로 차별과 억압을 받은 재일교포 변호사 이상일(김준한 분), 일제의 야만적인 착취 사실을 알지 못해 죄를 짓게 된 일본인이 등장하고, 더 나아가 이들은 '그녀'들과 연대한다. 영화는 남성과 여성, 일본과 한국이라는 이분법을 탈피해 다양한 층위의 개인들을 보편적 인권 아래 묶으려 시도한다.

이는 '허스토리'가 위안부 그리고 정신대 문제를 감정적으로만 호소하지 않는 점이기도 하다. 상위 권력인 식민 종주국, 민족, 국가 등의 역사적 피해자는 평범한 국민이고 사회적 약자이기 마련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구조적 폭력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보편적 인권에 어긋난다. 이에 대한 성찰은 폭력의 재생산을 막을 수 있는 시발점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왜 위안부 문제가 해결돼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득한다.

'허스토리'의 몰입감은 단연, 주연과 조연할 것 없는 배우들의 빛나는 열연에서 온다. 특별한 기교 없는 영화 특성에 맞게 김해숙부터 모든 배우들은 있는 그대로를 연기로 표현,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피해자를 대신한다. 특히 과거 피해 사실을 숨겨야만 했던 이들이 관부재판을 계기로 서서히 주체성을 획득, 일제의 만행을 온몸으로 고발하는 모습은 그 자체가 역사의 재현이다. 극중 외부인이자 원고단장 문정숙을 연기한 김희애의 걸크러시다운 면모는 또 다른 볼거리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인의 얼굴(visage)이 윤리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얼굴에 드러나는 '호소', 여기에 상대방이 '응답'하는 것이 윤리다. 법정에서 배우들이 재현하는 피해자의 얼굴과 몸에는 지난 세월의 아픔과 고통이 처절하게 드러난다. 여전히 공식적 사과가 없는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들에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허스토리'는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편 '허스토리'는 오는 27일 개봉한다. 러닝타임 121분, 12세 관람등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