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김지영 기자] 물 트라우마가 있었던 배우 고두심이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해녀로 변신했다. "고두심의 얼굴이 곧 제주"라는 소준문 감독의 말에 고두심은 "안 할 이유가 없었다"라며 이번 작품을 통해서 더 다양한 작품으로 대중과 만나고 싶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지난 30일 개봉한 '빛나는 순간'은 제주 해녀 진옥과 그를 주인공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 PD 경훈(지현우 분)의 특별한 사랑을 담는다. 고두심은 극 중 진옥으로 분했다.
평생을 제주에서 나고 자란 진옥은 물질을 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 몸이 성치 않은 남편을 돌보고 70대의 나이에도 물질로 생계를 꾸린다. 바다에서 딸을 잃었지만, 곧 삶의 터전이었던 제주 바다를 떠날 수 없다.
그러던 중 자신을 다큐멘터리 주인공으로 촬영하고 싶다는 경훈을 만난다. TV에 출연할 의사가 없었던 진옥은 그를 성가시게 생각하지만, 물질 중 바다에 빠진 것으로 오해해 자신을 구하겠다고 나선 경훈을 마주하고 난 뒤부터 그에게 자꾸만 관심이 생긴다. 그러던 중 경훈이 일 때문에 인사도 없이 서울로 떠나고 다른 해녀들은 "육지 것들은 믿으면 안 돼"라고 서운함을 토로한다. 그러나 진옥은 그가 자꾸 생각나고 마음이 쓰인다. 다시 경훈이 제주로 돌아오자 진옥은 다큐에 출연하겠다고 결심한다.
'빛나는 순간'의 출연을 고심하고 있던 중 소준문 감독은 그에게 "고두심 얼굴이 곧 제주"라는 말로 출연을 설득했다. 제주의 풍경이 그대로 담긴 이번 작품에서 소준문 감독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고두심이 아니면 안 됐다"는 말이 가슴 속 깊이 와닿는다. 거친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제주 4.3사건으로 부모를 잃었으며 딸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던 진옥의 고된 삶이 고두심 얼굴에 그대로 녹아있다.
"매일매일 저를 그리면서 썼다고 하셨다. '제주도하면 고두심이고 고두심 얼굴이 제주도 풍광'이라는 말에 '출연 못 해요'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냥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빛나는 순간'은 제주의 정신이자 혼인 해녀들의 삶, 제주 4.3사건의 아픔, 빛나는 순간이 되는 여성의 모습까지 다 다루는 영화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힐링했다. 제주 사투리도 더 쓰려고 노력했다. 스태프에게 제주도의 화려하지 않지만 담백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좋았다."
극 중 진옥은 해녀들 중 숨을 가장 오래 참는 상급해녀로 기네스북에 오른 인물이다. 여느 해녀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물속에 들어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물속에서 물질을 한다. 이를 연기한 고두심은 사실 물 트라우마가 있었으며 이를 극복하고 해당 장면들을 촬영했다고 밝혔다. 앞서 출연했던 '인어공주'에서는 물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했던 터. 이번 작품에서는 이 악물고 공포를 극복했다.
"중학교 때 친구들하고 바닷가에 갔다가 물을 먹어 겨우 살아났던 기억이 난다. 그 뒤부터 바다를 너무 무서워했다. '인어공주' 촬영 당시 첫 대본에는 물에 들어가는 장면이 없었는데 제가 물속으로 들어가고 전도연이 물 밖으로 나오면서 전환되는 장면이 생겼다. 물 트라우마가 있지만 극복하면 되겠지 싶었다. 필리핀까지 가서 촬영을 시도했는데 못하겠더라. 속을 다 게워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지금 못 하면 눈 감을 때까지 못 할 것 같았다. 제주 바다에서 독기를 품고 했다. 주변에 해녀 삼촌들이 있으니 나 하나 건져주겠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감독님이 시키는 건 다 했다. 내가 성에 안 차면 더 하겠다고도 했다. 사실 지금도 다른 바다에 가서 하자고 하면 못 하겠지만 제주는 들어갈 수 있다."
경훈의 설득으로 다큐멘터리 출연을 결심한 진옥은 자신의 아픔부터 털어내기 시작한다. 제주 4.3사건으로 부모를 잃었던 당시 진옥은 아주 어렸던 젖먹이 시절이었다. 총알이 사방을 지나가고 총에 맞은 엄마와 아빠가 쓰러지는 기억을 고통스럽게 털어낸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이 장면은 제주 4.3사건 당시의 처절함과 슬픔, 제주도민의 아픈 역사가 고두심의 열연으로 더욱 빛난다.
"제주 4.3사건 이후 3년 뒤 내가 태어났다. 어릴 때 들어도 잘 모르지만, 그 아픔이 내 살에 박혀있었던 것 같다. 처음엔 지금처럼 대사가 많지 않고 적었다. 그런데 촬영하면서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항상 그 아픔을 마음속에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절절하게 총을 누가 겨누고 있고, 피 흘리고 쓰러지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으니 스태프들도 울먹울먹하더라. 나도 찍고 나서 먹먹했다. '내가 어떻게 해냈지'라는 생각도 들고. 억울하게 가신 분들의 분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제주 4.3사건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고두심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대사와 표정 연기, 분위기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도 그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진다. 고두심은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아픔, 상황에 몰입할 수 있었던 상황으로 해당 장면을 촬영했다고 덧붙였다.
"더 하라고 하면 할 수도 있었지만 진짜 다큐멘터리가 아니니 한 번에 끝냈다. 내가 당하지 않았는데도 당한 사람처럼 살아서 그런 것 같다. 여기에 배우라는 직업이 한 몫을 한 것 같고. 몰입해서 실타래처럼 풀어내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직업이지 않나. 누구에 의해서 타이틀을 줘도 각자 분석해서 자기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 연기하는 편이 된 것 같다. 그 신은 감독님도 만족해하셨고 저는 '그분들의 마음이 달래질까'하는 생각이 컸다."
담담하게 시작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경훈은 그런 진옥을 토닥여주며 그의 아픔을 감싸 안아준다. 진옥의 아픔을 토로했던 곳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입맞춤을 나눈다. 이 밖에도 여러 농밀한 스킨십이 오가며 경훈과 진옥만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고두심은 경훈이 진옥의 귀를 봐주는 장면이 좋았다고 꼽았다. 이는 귀에 물이 들어간 진옥이 물을 털어내려 하자 경훈은 자신의 무릎에 누워보라고 한 뒤, 귀를 파주고 진옥은 경훈의 손길을 싫지 않은 듯 받아들인다.
"귀 후벼줄 때 너무 좋았다. 그 얼굴이 잠깐 보여서 너무 좋았다. 평상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살짝 터치하면서 오가는 감정도 좋았다. 어릴 때의 감정을 그림으로 끄집어내느라 애를 좀 먹었다. 그런 감정이 무뎌졌으면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잘 나온 것 같다."
진옥이 경훈을 만나면서, 또 경훈이 진옥과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 보듬어주면서 이들의 순간이 빛난다. 고두심은 자신의 빛났던 순간을 출산으로 꼽으며 "너무 신기했다"고 떠올렸다. 당시가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남녀의 사랑, 교감이 빛났던 순간이라는 분도 계시겠지만, 애를 잉태하고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렇게 닮게 나오는지. 여러 형태로 닮아서 하루하루 다른 얼굴이 나온다. 오늘 보면 아빠를 닮고 내일 보면 엄마 닮은 데가 있는 게 신기하더라. 여자가 제일 사랑받는 순간이기도 하고. 다들 나에게 관심을 주고 모든 식구가 나만 보지 않나. 나를 바라봐주는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항상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남편 역에만 그쳤던 고두심은 '빛나는 순간'으로 자신이 배우로서 더 빛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더 많은 이들과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며 "못할 게 없다"라고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최근 '나빌레라'와 같이 중년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이 나왔으면 한다고 바랐다.
"젊은 날에도 로맨스를 못 했는데 지금 할 줄 알았겠냐. 너무 뿌듯하고 좋다. 앞으로도 이런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최근 '나빌레라'에서 박인환 선생님이 연기하셨던 것처럼 그런 역할도 못 할 거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든 배우에게 끄집어낼 수 있는 좋은 요소들을 작가들이 써주셨으면 좋겠다. 사실 우리나라 여배우는 특히 이른 나이에 역할에서 벗어나게 만들어버리는 게 불만이다. 시장이 크지 않다보니 이런 것 같은데 더 다양한 작품과 캐릭터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지영 기자(jy1008@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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