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계에서 허진호 감독의 입지는 넓고도 공고하다. 그의 영화에 한번쯤 눈물 짓고 옛사랑을 떠올려 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청순한 사랑에 가슴이 아팠고, '봄날은 간다'와 '행복'에서는 사랑의 잔인함에 눈물을 흘렸으며, '외출'의 먹먹한 비통함에 가슴이 미어지던 느낌으로, 각기 서로 다른 추억에 빗대어 우리는 허진호의 영화를 사랑했다.
조용하고 사려 깊은 남자이자, 사랑의 감정을 조율하는 연출자로 허진호 감독은 대중에게 폭넓은 애정을 받았다. 이제 다섯 번째 영화 '호우시절'로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 때부터 러브콜을 보냈던 정우성과 드디어 조우한 '호우시절'은 중국 쓰촨성 대지진을 소재로 한 옴니버스 영화에서 기획됐다. 쓰촨 대지진 이후의 삶을 그린 옴니버스 영화로 출발한 '호우시절'은 장편영화로 독립했고, 극장 개봉을 통해 관객과 만난다.
영화는 미국 유학 시절 서로에게 호감을 품었던 한국남자와 중국여자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청두의 두보초당에서 우연히 조우한 뒤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을 그린다.
멜로의 감성을 눈빛으로 뿜어내는 배우 정우성과 중국의 청순 여배우 고원원을 캐스팅한 이번 영화 역시 보는 이의 마음 한 구석을 아련하게 울린다.
그러나 전작에 비해 뜨겁게 타오르다 휘발돼 버리는 사랑의 순간성에 대한 감독의 냉소적이면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고 따뜻하면서도 희망적인 내용을 채웠다.
"처음 옴니버스로 제안을 받고 청두에 가서 답사를 하고 소재를 생각한 뒤 장편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단편으로 보기에는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장편으로 제의했고, 중국 쪽에서 찬성을 했죠."
"고원원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중국에 가서 만나보고 캐스팅했어요. 이번 영화의 주인공 '메이'는 상처가 있지만 밝은 여자인데 머릿속에서 그려왔던 모습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느낌들이 좋았어요. 장쯔이나 탕웨이처럼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배우와는 달리 선입견 없이, 신인배우처럼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고요. 밝고 꾸밈없는 모습이 좋았어요."
허진호 감독은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밝고 유쾌한 이야기가 좋아지는 것 같다고 한다. 결혼 이후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니냐는 말에 그는 "그런 영향도 있을 것"이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밝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비중이 달라진거죠. 세상의 슬픈 면과 밝은 면이 있다면 전에는 슬픔을 어떻게 다룰 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밝은 영화가 더 재미있어지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진 거죠. 하지만 영화나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라고 봐요."
지진 피해 이후에 청두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희망적인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허진호 감독은 "슬픔이나 어두움에 여전히 매력을 느끼지만 밝게 마무리되는 영화를 하고 싶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허진호표 멜로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각별한 사랑이 때론 부담이 되지 않느냐는 말에 허진호 감독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의 전작이 새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그에게는 큰 짐을 지운다고.
"전작들에 대한 부담은 물론 있어요. 하지만 감독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영화가 나오느냐, 얼마나 좋아해줄까 하는 걱정이 생기죠. 대중들에 대한 부담이라기보다는 창작자로서 갖는 부담일거에요."
줄곧 멜로라는 장르를 통해 사람의 다양한 감정들을 보여온 허진호 감독은 "멜로를 계속 하는 걸 보니 내 안에서 그런 점에 끌리나 보다"고 말한다. 울고 웃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사람의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장르라는 점에서 멜로 영화를 계속 해온 것 같다고.
"멜로만 고집하는 건 아니에요. 코미디도 하고 싶고 액션도 하고 싶어요. 하지만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우디 앨런식 코미디나, 로맨틱 코미디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요즘은 소설 하나를 각색하는 작업 중이에요."
처음으로 해외 로케이션을 한 이번 영화가 재미있는 경험이 됐다는 허진호 감독은 중국 스태프들과의 작업과 이국적인 영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 등을 자산으로 얻게 됐다고 한다. 좋은 때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사랑과 인생에 대해 한결 따뜻해진 허진호 감독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조이뉴스24 정명화기자 some@joynews24.com 사진 김현철기자 fluxus19@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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