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두산)에게 지난 2년은 '악몽'이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출전 후 '국가대표 2루수'로 인정받았지만, 정작 팀내에서는 주전경쟁에서도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발목 등의 연이은 부상과 이에 따른 부진. 고영민은 그렇게 2년 동안 고개를 떨궜다.
이제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주위의 기대와 관심이 고영민에게는 스트레스 자체였지만, 부담감을 훌훌 털어버리고 2011 시즌 리그 최고의 2루수를 꿈꾸고 있다.
고영민을 만났다. 평소 취재진만 보면 도망다니기 일쑤였고, 방송 카메라만 보면 울렁증이 도져 말을 더듬는 고영민이었지만, 조용한 자리에서 만난 그는 의외의 달변가였다. 분위기를 주도한 고영민은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고 속에 있는 말들을 모두 털어놨다. 물론 4차원적인 답변은 고영민의 전매특허.
'매력덩어리' 고영민의 색다른 정신세계와 올 시즌 '부활찬가'를 들어봤다.
난 야구를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다고영민은 부진했던 지난 2년을 두고 "군대를 다녀왔다"고 표현했다. 베이징 올림픽 9전 전승의 금메달 신화 멤버로서 소중한 병역혜택을 받았지만, 실상 그 의미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2년을 그냥 쉬었다"고 덧붙인 고영민은 허탈하게 웃었다.
부상 불운이 잇따랐다. 스프링캠프서부터 허리가 아팠고, 허리가 나으면 옆구리가 결렸다. 시즌 돌입 후에도 발목 부상을 입었고, 나은 후에는 몸에 맞는 볼로 또 다쳐 엔트리서 빠졌다. 이러한 잔부상이 이어지면서 고영민은 자신감을 잃어갔고, 주변의 시선과 맞물려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정신적으로 나태해진 면도 없지 않았다. 올림픽 금메달로 기량을 인정받으면서 고영민은 방심했다. 병역혜택까지 받았으니 절박함도 없었다. 그렇게 고영민은 2009년과 2010년 부진의 나락에 빠진 채 시간만 보냈다.
"여유가 넘쳤던 것 같다. 금메달이 약이 된 게 아니라 독이 된 것 같다. 27살에 군문제를 해결하게 돼 야구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해이함으로 이어졌다. 그런 생각이 있었으니 부상이 따라온 것 같다."
이뿐만 아니다. '국가대표 2루수'다운 플레이를 펼쳐야 한다는 압박감도 괴로웠다. 고영민은 스스로 "야구를 잘했던 선수가 아니다"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최근 수 년간 받은 스포트라이트가 편치 않았다.
"난 야구를 잘했던 선수도 아니고, 스타플레이어도 아니었다. 그래서 못할 때는 '못하면 어떠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보는 시선들이 많아져 힘들었다. 어차피 못하는 애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하시니까. 잘해야 하는데, 잘해야 하는데, 부담감이 정말 컸다."
올해는 느낌이 좋다2011 시즌 고영민은 '부활'을 꿈꾸고 있다. 물론 본인의 생각대로라면 '부활'이 아닌 '발전'이지만 몸컨디션이 예전과 다르다. 특히 잔부상이 없는 것이 고영민을 웃음짓게 만들고 있다.
"전훈캠프에 참가하면서 올해처럼 안아팠던 적은 처음이다. 이 때를 시작으로 일년 내내 아팠는데, 지금은 아픈 곳이 없다. 느낌이 좋다. 2년 동안 못한 탓에 자신감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이제는 많이 생겨났다."
이와 함께 모든 걸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영민은 생각이 많은 완벽주의자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플레이에 방해가 됐고, 이제는 편하게 야구를 할 생각이다.
"팬클럽에서 내가 생각이 많다고 하더라. 실제로 생각을 버리라는 주제로 된 책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난 100%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했다. 열 번 타석에 서면 열 번 안타를 쳐야 웃었다. 뭐든지 완벽해야 했다. 프로 입단 후에야 10번 나가서 3번만 쳐도 대한민국에서 최고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성격이 그래왔었고, 프로 와서도 잘 안고쳐졌다. 그러다가 계속 2군에 있으면서 마음을 달리 먹게 됐다."
말못하는 고영민? 카메라 울렁증일 뿐고영민은 팬들 사이에서 최정(SK)과 함께 '인터뷰를 못하는 선수'로 회자되고 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영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본 모습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는 표정으로.
"난 말을 잘한다. 다만 사람들이 많이 있는 장소에서는 날 집중하게 되고, 그러면 말이 연결이 안될 뿐이다. 하나-둘-셋 차례대로 말을 해야 되는데, 하나-셋-둘로 이어진다. 특히 카메라가 있으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이다. 사실 여성분들 앞에서 술먹으면 말을 더 잘한다.(웃음)."
고영민의 플레이는 '상상플레이?'고영민은 항상 수비상상을 한다. 이런 타구가 오면 이렇게 처리하겠다는 패턴을 되뇌이면서 그라운드에 선다. 그러다보니 다소 해괴한(?) 명플레이도 속출한다. 고영민은 모든 것이 계획적이라고 했다.
일례도 소개했다. 지난해 6월 14일 잠실 SK전. 6회초 무사 1루서 박경완의 강한 타구를 글러브로 잡아냈지만, 공이 글러브에 끼자 고영민은 글러브채로 2루 수비에 들어온 손시헌에게 토스하며 주자 김재현을 잡아냈다. 이에 대해서도 고영민은 "어릴 때부터 상상한 플레이"라고 웃었다.
"난 상상을 많이 한다. 그 플레이도 항상 생각해오던 것이었다.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연출하고 싶은 장면이 꼭 오더라. 당시 타구가 빨라 글러브에 끼었는데, 상상했던 장면이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그냥 냅다 집어던져버렸다. 사실 잡다가 놓치면 공을 바로 걷어차 2루로 토스하는 상상도 많이 한다.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고영민은 이런 스타일 탓에 곤욕도 치렀다. 바로 베이징올림픽 결승전 당시 9회 병살타로 연결시키는 장면이다. 당시 고영민은 타구를 토스받은 후 2루 베이스를 밟고 1루로 송구, 병살플레이를 성공시켰다. 하지만 엇박자(?) 점핑스로였고, 이후 고영민은 두산 복귀 후 한 동안 병살타 처리 연습만 해야했다. 고영민은 그 때를 "참 괴로웠다"고 회상했다.
물론 '2익수'라고 불릴 정도의 수비력은 운이 아니다. 타자들의 방망이 궤적을 보고 한 발 앞서 움직인다. 그는 "수비할 때는 타구가 오면 뛰어가는게 아니라 미리 움직여야 한다. 파울을 치더라도 한 발 앞서 스타트를 해야 한다"고 본인의 수비력을 뽐내기도 했다.
2011 목표고영민은 아직까지 못해본 타율 3할 욕심을 버렸다. 자신감을 갖고 '평정심'으로 시즌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욕심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장타, 많은 안타 욕심 없이 몸에 맞는 볼이라도 출루가 우선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다들 3할을 쉽게 생각하는데 그게 참 힘들더라. 난 3할 치는 선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야구를 그만두기 전까지 한 번은 안치겠느냐. 난 (김)현수가 아니니 장타 욕심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133경기에 나가 매 경기마다 꾸준하게 안타를 한 개씩만 쳤으면 좋겠다."
팬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고영민은 쑥스러운 듯 난감하게 웃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응원을 부탁했다.
"2009년, 2010년 응원을 많이 해주셨는데, 그 보답을 많이 못해드려서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올해는 정말 많은 준비를 해왔습니다. 야구장에서 제 이름을 불러주신 보답을 올해는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조이뉴스24 권기범기자 polestar17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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