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2000년대 후반, 한국 드라마계 한 획을 그었던 캐릭터들의 중심에는 배우 김명민이 있다. MBC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야망에 눈이 먼 의사 장준혁으로 분한 그는 수많은 '폐인'들을 양산하며 작품의 인기를 견인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는 유아독존형 인간의 전형인 강마에로 분해 '전에 없던 캐릭터와 연기'라는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김명민이 소화한 역할들이 비단 지적이고 차가운 이미지의 전문직 캐릭터만은 아니었다. SBS 드라마 '불량가족'에선 조직폭력배 출신으로 가짜 가족을 이끄는 달건을 연기했고 영화 '페이스메이커'에선 그늘에 가려질 숙명을 타고난 육상 선수로 분했다. 루게릭병 환자 역을 맡아 화제를 모았던 '내 사랑 내 곁에'는 그의 투혼으로 빛난 영화였다.
일부 작품에서 연기한 유독 강렬한 인상의 캐릭터 탓에 '고생하는 배우' 이미지를 얻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김명민의 필모그라피는 그 어떤 배우의 것보다 다채롭고 진지하게 채워졌다.
겉보기에 부러울것 없어 보이는 전문직 남성부터 난치병을 앓는 환자, 가족의 생사를 등에 짊어진 평범하기 그지없는 가장까지, 김명민은 양 극단의 이미지를 무리 없이 몸에 새길 수 있는 흔치 않은 배우다.
◆"극중 재혁, 히어로가 아니라서 매력적이었다"
5일 개봉한 영화 '연가시'에서 김명민은 두 아이의 아빠이자 순종적인 아내의 남편 재혁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국내 최초 감염 재난영화를 표방한 '연가시'는 변종 연가시에 의해 발생하는 국가적 재난 상황을 그린다. 재혁의 아내 경순(문정희 분)과 두 아이는 휴가철 놀러간 계곡에서 변종 연가시에 감염되고, 재혁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연가시 궤멸을 돕는 약 윈다졸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지난 4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김명민은 "재혁이 히어로가 아니라는 사실이 아쉬움을 준 동시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출연을 결정하던 당시를 회상했다.
재혁의 얼굴은 그야말로 평범한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극중 촉망받는 교수였던 그는 주식투자에 실패를 겪은 뒤 제약회사 영업직원이 된다. 재혁은 고달파진 신세를 한탄하며 패배주의적 정서에 젖은 인물. 귀가한 자신을 보고도 식탁에서 꿈쩍 않는 어린 딸에게 '아빠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하냐'고 핀잔을 주고, 자신을 걱정하는 아내에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 다행으로 알라'고 쏘아붙이는 식이다.
변종 연가시라는 신선한 소재도 그가 출연을 결심한 계기 중 하나였다. 김명민은 "특화된 소재가 좋았다"며 "마냥 허구로 느껴지지 않는, 실제로 존재하는 기생충을 가지고 변종이라는 설정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큰 메리트였다"고 설명했다.
◆"김명민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약 양보하지 않았다"
이날 김명민은 극중 하이라이트라고 부를법한 몇몇 장면들에 대해서도 뒷이야기를 풀어놨다. 특히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간신히 구한 약을 군중들에 의해 잃는 장면에 대해선 그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극중 재혁은 품귀 현상으로 구하기 어려워진 변종 연가시 궤멸 약품 윈다졸을 가까스로 손에 넣는다. 그러나 어린 아이를 안고 우는 여성에게 한 알의 약을 양보하려다, 몰려드는 군중에 습격당해 다시 빈 손이 된다.
"만약 나 김명민이었다면 절대 그렇게 약을 양보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이들에게 약이 잘 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여유분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찌될지 모르니까요.(웃음) 정말 지나칠 수 없었다면 다른 방법으로 줬겠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있으니 전화번호를 적어달라고 하든지. 그렇지만 김명민이 아니라 극중 재혁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영화에서 재혁은 약을 구할 기회를 총 세 번 놓쳐요. 약을 많이 놓친다고 불만을 보인 분들도 계시지만, 약을 빨리 찾아버리면 영화가 너무 빨리 끝났을 거에요.(웃음)"
변종 연가시에 감염된 이들은 지독한 갈증을 느끼며 물을 마셔대다 자신도 모르게 물에 뛰어들어 죽음을 맞게 된다. 아내 경순과 아이들이 이성을 잃고 물을 찾아 집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재혁은 사력을 다해 이들을 붙잡으며 절규한다. 그가 두 팔에 딸과 아들을 끼우고, 양 다리로는 아내를 꼭 붙든 채 몸부림치는 이 장면은 빠른 호흡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 장면이요? 반나절은 찍었죠. 정말 아비규환이었어요. 한 명을 잡으면 한 명이 빠져나가는 상황이니까요. 워낙 정신없는 신이라 구체적으로 콘티를 짜서 움직일 수도 없는 장면이었어요. 무척 처절하면서도 해학적인, 재치가 있는 장면이죠."
극중 재혁의 아들과 딸로 출연한 아역 배우들은 김명민을 실제 아버지를 따르듯 좋아했다. 그는 아이들을 "내 아들보다 더 살갑게 굴더라"며 "'아빠'하고 부르면서 안기기도 하는 모습이 무척 예뻤다"고 떠올렸다.
◆"작품 선택은 순간의 느낌"
김명민은 논리나 이성적인 판단보다 "그 순간의 느낌"으로 작품의 출연 여부를 결정한다. 그는 "소개팅 자리에서, 늘 되뇌이던 이상형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상대에게도 미칠듯한 끌림을 느끼곤 하지 않느냐"며 "작품 선택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결코 영웅이 아닌 평범한 남성 재혁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 몸을 내던지는 '연가시'의 줄거리는 그래서 김명민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재난을 맞닥뜨린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나름의 재미를 안길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처럼 나라와 세계를 구하는 히어로, 물론 멋지죠. 그렇지만 인간성이나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어요. 재혁에게 끌렸던 건 그가 영웅이 아니었기 때문이예요. 너무나도 나약한 인간이라 당할 수밖에 없고, 위험해 보이는 일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런 처절함이 관객들에게도 매력으로 다가갈 거라고 생각해요."
김명민의 마지막 말은 개봉 후 연일 박스오피스 정상을 수성중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과 뜨거운 관심 속에 개봉을 앞둔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염두에 둔 듯 들렸다. '연가시'가 굵직한 할리우드 히어로물 사이에서 나름의 존재감을 떨칠 수 있을지 기대해볼 만하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박영태기자 ds3fan@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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