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재기자] *2012년 8월7일, 15일차
영국 런던으로 오기 전 한국 축구 올림픽대표팀의 축구 일정을 살펴봤다. 뉴캐슬을 시작으로 코벤트리를 거쳐 웸블리로 간다. 순간 설렜다. 웸블리라. 축구의 '성지'라 불리는 그곳에 있다는 상상만으로 설렜다.
한국이 8강에 올라간다면? 조 1위를 했을 경우 웸블리에서 결승까지 치른다. '성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단 생각에 다시 설렜다. 조 2위를 한다면 8강전 장소는 카디프였다. 그리고 4강전은? 4강전이 열리는 경기장을 보는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아직 올림픽이 시작되지도 않았고 한국 축구가 4강에 올라갈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던 상태였는데 두근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4강이 열리는 장소가 바로 올드 트래포드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바로 그 '꿈의 구장'이라 불리는 올드 트래포드였다. 축구를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가보고 싶은, 밟아보고 싶은, 그야말로 꿈과 같은 경기장이다. 한국이 예선을 조 2위로 통과해 4강까지 올라가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와 바람을 품고 런던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막연했던 상상이 현실이 됐다. 지금 기자는 올드 트래포드 구장의 기자석에 앉아 있다. 눈앞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고 적힌 관중석이 보인다. 붉게 물들어 있는 관중석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상상만 해봤던 올드 트래포드를 지금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밟고 있는 것이다. 홍명보 감독과 18인의 태극전사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올드 트래포드에 설레는 이유. 물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세계 최고의 클럽에 대한 설렘이다. 기자는 데이비드 베컴이 활약하던 당시 맨유에 푹 빠졌었다. 그리고 한국 축구팬이라면 절대로 올드 트래포드와의 인연을 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한국 축구의 '심장' 박지성의 홈구장이었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지난 2005년 맨유에 입단해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한국인 최초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무대에 입성했는데 그 클럽이 잉글랜드 최고의 명문 맨유였다. 초반에는 '유니폼 판매용'이라는 비아냥거림도 들어야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비아냥거림은 찬사로 바뀌었다.
박지성은 맨유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핵심 전력 선수로 거듭났으며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품었고 아시아인 최초로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나서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박지성의 존재감이 높아질수록 한국 축구팬들의 맨유에 대한 사랑은 커졌고, 맨유는 국민 클럽이 됐다.
그런데 2012년 맨유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박지성이 맨유와 이별을 했다는 소식이다. 박지성은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전격 이적했다. 더 많은 출전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을 택했다. 박지성 본인을 위해서 현명한 선택이었다. 많은 팬들이 맨유를 떠나는 것에 아쉬움을 드러내면서도 박지성의 선택에 박수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기자는 박지성이 떠난 후에야 올드 트래포드로 왔다. 박지성이 활약할 때 왔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쉬움을 가진 채 올드 트래포드 안으로 들어왔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클럽이라 역시나 경기장 전체가 박물관이었다.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 에릭 칸토나 등 맨유를 거쳐간 전설들을 다시 볼 수 있었고, 맨유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사진들도 전시돼 있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젊은 모습,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다소 촌스러웠던 초창기 모습도 볼 수 있어 새로웠다.
한참을 구경하다 기자석으로 올라가는 길. 한쪽 벽면에는 과거가 아닌 현재 맨유를 전시해 놓았다. 지금 맨유에서 활약하는 선수들 사진을 걸어놓았다. 그것도 맨유 모든 선수들이 아닌 스타급 선수들에게만 공간을 허용했다. 치차리토, 나니, 비디치 등을 지나다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박지성의 사진이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었다.
박지성이 힘차게 달리는 모습의 사진이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또 있었다. 믹스트존으로 내려가는 길, 박지성이 환호하는 장면이 벽 한 쪽 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박지성은 맨유에 머무르지 않고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떠났다. 지금 박지성은 퀸즈 파크 레인저스 소속이다. 그렇지만 '박지성의 향기'는 여전히 올드 트래포드에 남아있었다. 박지성이 떠났다고 해서 그의 사진을 바로 내리지는 않았다.
간혹 그렇게 하는 클럽도 있다. 악연으로 끝났을 때 그렇게 한다. 하지만 박지성은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서로를 위해 이별을 택한 것이다. 박지성이 떠나자 퍼거슨 감독이 아쉬움을 전했고 맨유의 수많은 선수들도 이별의 안타까움을 전했다. 그동안 박지성이 올드 트래포드에서 어떻게 활약해왔고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다음 시즌이 시작된다면 지금 박지성의 사진은 내려올 것이다. 그렇지만 크게 섭섭해할 필요는 없다. 박지성의 사진은 없어지지만 박지성이 올드 트래포드에 남긴 추억과 감동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지성은 이날 한국-브라질 경기가 열린 올드 트래포드를 방문해 후배들을 응원했다.
<16편에 계속…>
조이뉴스24 맨체스터(영국)=최용재기자 indig80@joynews24.com 사진 최규한기자 dreamerz2@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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