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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광해', 모두를 매혹시킨 '가짜의 품격'


추창민 감독 연출, 이병헌·류승룡 주연…19일 개봉

[권혜림기자] 분명 가짜인데, 묘한 품위가 느껴진다. 신이 나면 만담꾼 시절 몸에 밴 춤사위가 절로 나오고 영 입에 붙지 않는 '왕 매뉴얼' 멘트에 혼자 웃음을 터뜨리지만, 영화 속 천민 하선은 단 한 순간도 천박하지 않았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에는 두 명의 왕이 등장한다. 자신을 해하려는 음모가 두려워 저와 꼭 닮은 대역을 섭외하는 진짜 왕 광해와, 어느날 갑자기 궁에 끌려와 왕 행세를 하게 된 천민 하선이 그들이다.

'광해'는 배우 이병헌이 처음으로 사극과 1인2역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뚜껑을 연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두 명의 왕이라기보다 가짜 왕 하선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었다.

기껏 광해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던 천민 하선은 두려움에 떨다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진짜' 왕 광해보다 '더욱 진짜같은' 왕의 면모를 자랑하게 된다.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온몸으로 체득했던 그는 궁내 어느 인재들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가난한 이들의 속사정을 꿰뚫는다.

이에 의심과 불안이 어린 눈초리로 그를 주시하던 허균(류승룡 분) 역시 하선을 보는 눈을 달리하게 된다. 타고난 신분조차 가리지 못한 하선의 올곧은 품성과 남다른 재치가 그의 존재를 두고 마음졸이던 궁인들의 마음까지 훔친 셈이다.

사사건건 하선과 충돌하던 도승지 허균, 극적인 해프닝 후 하선을 진짜 왕으로 믿고 더 깊은 충심을 맹세하게 된 도부장(김인권 분)은 물론, 그를 보필하던 조내관(장광 분)은 관객과 함께 하선의 품격있는 '왕 노릇'에 조용히 감탄한다. 허례허식 없는 실용 정치를 말하는 하선의 모습은 '가짜' 왕이라기보다 '또 다른 왕'에 가깝게 비춰진다.

영화는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현실 정치의 논리, 왕의 허울을 버려야 비로소 진짜 왕이 될 수 있다는 이상론적 희망을 때로 직접적으로, 때로 완곡하게 전달한다. 자칫 뻔한 교훈극이 될 수 있었던 이야기는 세련된 가공을 거쳐 잔잔한 공감을 자아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웃음 포인트도 '광해'의 미덕이다. 코믹을 표방하지 않았음에도, 영화는 적재적소에 심어둔 소소한 웃음들로 관객석을 뒤흔든다. 하선은 허균, 중전(한효주 분), 조내관, 도부장, 사월(심은경 분) 등 극중 인물들과 제각기 다른 모양새의 관계를 맺는다.

극이 전개될수록 관계에는 사연이 깃들고, 이들 각자와 하선이 꾸리는 이야기들은 제법 균등한 밀도를 자랑한다. 스크린 속 하선이 누구와 있든 관객이 치밀한 감정선을 따라가며 몰입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사극에 첫 도전한 배우 이병헌의 연기력을 확인하고 싶은 이들에게 '광해'는 첫 장면부터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광해가 궁인들의 손길을 받으며 몸을 단장하는 첫 장면은 뛰어난 미쟝센과 함께 어디에 가져다 놔도, 어느 앵글로 비춰도 쉽게 감춰지지 않는 이병헌이라는 묵직한 배우의 무게를 담았다.

색이 변한 은수저를 보고 진노하며 나인에게 음식을 대신 먹으라 호통치는 두 번째 장면에서 이병헌의 외양과 눈빛, 대사 톤은 모두 사극에 꼭 맞춘듯 어울린다. 사극 연기를 처음 시도하는 배우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선으로 분해 능청스런 대사와 춤사위로 기생집을 누비는 모습은 그간 이병헌이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얼굴이라 시선을 붙잡는다. 강렬한 눈빛, 숨소리까지 귀기울이게 하는 목소리, 현란한 액션 연기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던 그지만 장난스럽고 소탈한 천민으로 분한 이병헌은 그 자체로 하선이었다.

1인2역을 소화한 이병헌의 호연이 영화를 빛낸 것만은 확실하지만 '광해'는 배우들의 고른 호연과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를 두루 지닌 영화다.

김인권이 연기한 무사 도부장의 마지막 대사는 누가 봐도 클리셰로 지적할법한 장면임에도 묘한 울림을 남긴다. 앞서 코믹한 연출로 결속을 다진 두 사람이 비극적 이별을 맞을 때, 관객들은 가짜를 기꺼이 진짜로 믿고자 했던 인물들의 속내를 가만히 되짚게 된다. 몰입을 한껏 도운 두 배우의 연기력은 두말할 필요 없이 훌륭하다.

개봉 전 이병헌과 카리스마 대결을 펼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류승룡의 연기는 기대 이상의 절제미로 영화를 탄탄하게 받쳤다. 웃음기 하나 없는 허균의 얼굴로 관객들의 배를 잡게 만드는 연기를 보노라면, 과연 그가 몇달 전 스크린에서 희대의 카사노바로 분했던 류승룡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하선의 모든 행동을 지적하고 감시하다 되려 '정이 들어버린' 허균은 천민 출신 가짜 왕이 아닌, 그저 궁에 들였던 벗을 떠나보내는듯한 얼굴로 하선의 마지막을 배웅한다. 묘한 애틋함을 가득 담은 그의 눈빛은 배우 류승룡이 지닌 내공의 깊이만큼이나 짙게 일렁인다.

차라리 판타지에 가까울 '광해'의 엔딩은 일부 관객들에게 아쉬움으로 지적될 법하다. 그러나 영화는 '역사 속에 사라진' 꿈 같은 15일의 기록을 다시 그린 팩션(faction)이다. 이 이상 꿈결같은 엔딩은 상상하기 어려울 듯하다.

추창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광해'는 오는 19일 개봉한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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