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혜림기자] 애니메이션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일본의 3.11 대지진 이후 영화 제작을 망설인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국가적 대재난 앞에서 1920년대 관동대지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바람이 분다'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남다른 고민을 겪었던 탓이다.
26일 일본 도쿄도 코가네이시에 위치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뜰리에 '니바리키'에서 한국 취재진을 대상으로 영화 '바람이 분다'의 공식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출을 맡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가 참석했다.
'바람이 분다'는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벼랑 위의 포뇨'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전투기 제로센을 설계한 실존 인물 호리코시 지로의 청년 시절을 소재로 그의 꿈과 사랑을 다뤘다. 1920년대 불경기와 가난, 병, 대지진으로 고통받던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했다.
이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든 시기가 일본 버블경제가 절정이었을 때다. 이 사회가 도대체 어찌될까 고민하며 만든 작품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 상황을 보면 사실 '모노노케 히메'를 만들어야 할 것 같지만 그 영화는 이미 만들었다"며 "'벼랑 위의 포뇨'를 만든 뒤 정말 지진이 왔고 '바람이 분다'를 만들며 3.11 지진을 겪었다. 마치 내가 사회 분위기를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고 고민스러웠던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이 영화에는 지진 장면이 등장한다"며 "콘티를 그리고 나서 3.11 지진이 발생했다. 그 때 이 곳(아뜰리에) 위층 방에 있었다. 점점 재해가 크다고 느꼈을 때 이 작품을 계속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다"고 고백했다. 감독에 따르면 한 스태프는 '더 이상 이 작품을 못 만들겠다'고 남다른 고충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미야자키 감독은 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나는 패닉 영화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며 "지금도 옳은 결정이었다는 긍지를 갖고 있다"고 돌이켰다. 이어 "(영화 속) 관동대지진은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였다"며 "이전까지 일본은 안정적 사회였지만 이후 모든 것이 타버렸다. 일반적인 화재가 아니었고,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된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내 아버지는 당시 9살이었고 아버지에 따르면 당시 3만8천명이 었다고 하더라"며 "영화에는 호리코시 지로와 호리 타츠오라는 두 인물 뿐 아니라 내 아버지의 삶도 같이 녹아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이날 감독은 "'붉은 돼지'는 공중전을 그리고 싶어 만든 작품이다. 돼지라면 죄가 없을 것 같아 인물을 돼지로 설정했었다"며 "'바람이 분다'에서는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했다"고 말했다. 극 중 주인공 지로는 실제 인물인 비행기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삶과 소설가 겸 시인 호리 타츠오의 동명 소설 '바람 분다'의 로맨스를 결합해 만들어졌다.
호리코시 지로가 만든 전투기 제로센은 대거 태평양전쟁에 사용됐고 이 지점은 그를 전범(戰犯)으로 바라볼 만한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감독은 전쟁의 한가운데를 살았던 주인공 지로의 삶을 그리며 개인의 꿈이 시대와 만나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낼 수도 있음을 알린다. 비행기를 "전쟁의 도구가 아닌 꿈"이라고 표현하는 대사가 이를 함축한다.
미야자키 감독은 "주인공인 지로가 만들었던 1만 대 이상의 비행기가 태평양전쟁에 쓰였다"며 "열심히 살아왔다고 해서 무조건 단죄가 되는 것인지를 문제로 삼았다"고 말했다.
감독은 "예를 들어 '이웃집 토토로'를 만들 때는 어린이들이 밖에서 뛰어놀길 바랐었다. 하지만 결국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노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TV만 보게 되더라"고 당시 느낀 감정을 털어놨다. "열심히 한다고 좋은 결과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말했다.
또한 "실제 카미카제 특공대에서 제로센은 구식이라 큰 역할을 못했다"며 "그러나 호리타시 지로는 전쟁 후에도 같은 회사에서 일을 했으니 뭐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실제 인물의 심경을 추측했다. 이어 "그는 시대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그가 옳았다거나 그르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더 비참하다'고도 이야기했었다"고 알렸다.
"히노마루라고 하는 일본기의 상징을 이렇게 많이 그려본 작품이 없었다"고 말을 이어간 감독은 "나중에는 붙어있는 일본기들이 결국 전부 떨어지게 된다. 이를 보고 여러 말들이,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영화에서는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시리즈의 총감독 안노 히데아키가 지로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이후 그와 모든 작품을 함께 한 히사이시 조가 음악 감독을 맡았다.
'바람이 분다'는 제7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일본에서는 지난 20일 개봉해 흥행 중이다. 오는 9월 초 국내 개봉 예정이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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