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천상 배우의 얼굴이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둘째치더라도, 천우희에겐 매 작품 전혀 다른 이미지로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매력이 있다.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첫 공개돼 호평을 얻은 이수진 감독의 영화 '한공주'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공주'는 올해 BIFF 비전의 밤 시상식에서 시민평론가상과 CGV 무비꼴라쥬상 2관왕을 차지했다. 심사평에선 주인공 한공주 역을 열연한 천우희의 연기 칭찬이 빠지지 않았다. 이수진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더불어 타이틀롤을 기막히게 소화한 천우희의 재능이 다시금 빛을 본 순간이었다.
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 9일, 부산 해운대에서 천우희를 만났다. 누군가에겐 낯선 배우일 수 있지만, 그는 이미 '아는 사람은 아는' 연기자다. 전작인 '써니'(2011)와 '마더'(2009)에서도 인상깊은 연기를 펼쳤다. 무엇보다 이날 '한공주'를 본 관객들에게, 극장을 빠져나오는 천우희의 모습은 여느 톱스타의 모습 못지 않게 빛이 났을 법 하다. 영화 속 천우희의 연기는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온 고등학생 한공주의 시선을 따라간다. 끔찍한 사건을 겪은 끝에 학부모들의 압력으로 전학을 해야 했던 한공주는 새 학교에서 친구들의 추천으로 합창 동아리에 몸을 담는다. 그의 뛰어난 노래 실력을 응원하려 했던 친구들이 공주의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고, 그의 신변을 알게 된 학부모들이 새 학교로 들이닥친다.
천우희는 이날 GV에서 "캐릭터를 멀리 보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배우가 자기 감상에 빠져 인물의 감정을 보다 섬세하게 그리지 못하게 될까 우려했다는 이야기였다. 이어진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는 "너무 감정적으로 몰입하면 이 친구의 다른 면,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많이 놓치게 될 것 같았다"고 돌이켰다.
"표현하기 애매한 이야기이긴 해요. 몰입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친 몰입이 영화에 해가 될까봐 인물로부터 조금 떨어져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사람들이 자기 감정에 심취해 우울에 빠지곤 하잖아요. 하지만 정말 최악인 상황에선 그런 분위기를 탈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건 덜 힘들 때야 가능한 일이라고 봐요. 공주는 지금 최악의 상황에 와 있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분위기에 젖지 않았을 것 같아요."
영화의 줄거리는 몇 년 전 많은 이들을 경악케 했던 청소년 집단 성폭행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실화를 그대로 그린 작품이 아닌 만큼, 영화는 공분을 자아내는 데 집중하지 않고 세상에 내던져진 소녀 한공주의 담담한 일상을 비춘다. 분노보다 침묵에 가까운 공주의 정적인 모습 역시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많지 않은 대사와 담담한 표정으로 공주의 내면을 그려야 했으니 배우로서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을 법 하다.
천우희는 "감독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며 "내가 슬프고 불쌍하다는 생각보단 이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주변에서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많지만, 공주는 단단한 친구"라고도 덧붙였다. 그는 영화에서 그려진 모습 외에, 공주가 겪었을 고통과 갈등의 전사(前史)를 가슴에 심었다.
"수차례 그런 고통을 겪었으니, 공주도 별 걸 다 해봤을 거예요. 애원도 하고 신고도 하고 분노도 했겠죠. 하지만 모든 게 현실적으로 되지 않아서,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예요. 속에선 감정이 용솟음치고 있겠죠. 영화는 그런 시기 이후의 일들이니 조금 더 세세하게 그 친구를 바라볼 수 있던 것 같아요. 설마 공주가 혼자 있을 때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 마음은 어떨지 생각하면 담담하게 있기 어려운 일이죠."
영화는 공주 뿐 아니라 그와 함께 고통을 겪었던 친구 화옥(김소영 분), 그리고 새롭게 다가온 친구 은희(정인선 분)의 고민도 멀찍이 바라본다. 공주와 은희와 관계는 화옥과 공주 사이를 가로질렀던 갈등이 연장 혹은 재현된 모양새다. '한공주'는 물음을 던진다. 공주가, 혹은 화옥이 내 곁으로 올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공주에게 뭘 말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열심히 살아'라는 말은 그들에게 와 닿지 못할 위로라고 생각해요. 시간을 주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알아서 일어날 수 있도록. 조급해 말고 그들이 알아서 일어설 수 있게 시간을 준다면 어떨까 싶어요. 영화 속 모든 일을 빨리 해결하려는 사람들과 다르게, 말 없이 그들을 지켜봐 주고 싶어요.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학교 합창단이 연습하던 아카펠라를 우연히 듣고, 공주는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흥이라곤 없던 공주의 일상에 비로소 리듬이 덧입혀지는 순간이다. 이를 들은 합창단원 친구 은희는 공주의 재능에 감탄하며 함께 노래를 부를 것을 제안한다. 공주가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장면이나 교실에서 홀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신에는 모두 천우희의 목소리가 사용됐다. 화려한 기교가 돋보이는 가창은 아니었지만 감미롭고 따스한 목소리가 귀를 이끈다.
"노래에도 욕심을 냈어요. 감독님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해서 하긴 했는데, 공주는 노래를 잘 하는 친구니 저도 잘 해야 하잖아요. 기술적으로 잘 하는 것도 좋지만, 감정이 드러나는 고등학생의 목소리를 냈으면 했어요. 감독님이 원한 것도 그랬고요. 오디션 때 노래를 불렀는데, 감독님이 좋게 들으셨나봐요. 영화 속 노래는 '한공주'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곡이예요."
'한공주'의 공주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모습이었지만, 천우희는 '써니'에서도 여고생을 연기했었다. 본드에 취해 가장 아끼던 친구 수지(민효린 분)의 얼굴에 상흔을 내는 상미 역이었다. 잔뜩 날이 선 눈도 초점 없이 풀린 눈빛도 제 것처럼 소화해냈다. 맑은 얼굴로 조잘조잘 이야기를 풀어놓는 지금 모습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써니'로 기억해 주시는 게 감사하기도 한데, 조금은 짐이 되기도 해요. 강하게만 보는 분들도 있고요. 상미와 공주는 모두 고등학생이긴 해도 신분만 같을 뿐 굉장히 다른 캐릭터죠. '써니' 때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연구를 많이 했어요."
캐릭터마다 감쪽같이 다른 얼굴로 관객을 만난 것에 대해 천우희는 작게 웃으며 비밀 아닌 비밀을 털어놨다. "작품을 할 때마다 얼굴이 변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사람들이 마음 먹는 대로 얼굴이 변한다고 하지 않냐"며 "심경에 따라, 작품에 따라 분위기가 바뀐다. '써니' 때는 (극 중 인물처럼) 마음을 좋지 않게 먹었었다"고 돌이켰다.
천우희의 실제 나이는 만 26세. 다시 고등학생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천우희는 "내게 다른 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고민은 했다"면서도 "'그럼 30대에 20대 역할을 연기하면 되지' 싶은 마음으로 출연을 결심했다"고 웃으며 답했다.
"'한공주'의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왠지 내가 할 것 같은데'라는 촉이 왔어요.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그런 느낌이 있었거든요. 학생 역할이지만 보여줄 게 많은 영화라고 느꼈어요. 저는 김해숙 선생님을 존경하는데, 작품마다 그 인물로 보이는 게 무척 멋지기 때문이예요. 수많은 엄마 캐릭터를 연기하셨지만 다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 면을 닮고 싶어요."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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