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기자] 두산과 SK의 주중 3연전 마지막 경기가 열린 10일 잠실구장. 두산이 2-0으로 앞선 6회말 1사 뒤 양의지가 좌측 2루타로 멍석을 깔았다. 후속 이원석의 좌익수 뜬공 뒤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8번 김재호. 마운드 위의 김광현은 무척 신중했다. 앞선 두 타석서 좌중간을 가르는 3루타와 볼넷으로 김재호에게 당한 기억이 머릿속에 맴도는 듯했다.
스트라이크존 바깥으로 빠지는 공 4개를 연속해서 던졌다. 포수가 일어나지 않았을 뿐 사실상 고의사구였다. 다음 타자인 9번 정수빈을 의식한 '경원'이었다. 왼손타자 정수빈은 3회 희생번트와 4회 1루땅볼로 이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김광현의 '선택'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합리적인 듯 보였던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됐다. 정수빈은 침착한 타격으로 김광현의 진을 뺐다. 그렇지 않아도 투구수 100개를 넘어서며 힘이 떨어진 김광현을 약이라도 올리듯 '커트 행진'을 이어갔다. 초구 볼을 고른 뒤 내리 공 5개를 파울로 커트해냈다. 이어 향상된 인내심으로 볼 3개를 내리 골라 1루로 걸어갔다. 2사 1,2루 상황이 만루로 변했다.
이어 우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두산에서 가장 호조를 보이고 있는 민병헌. 아니나 다를까 그는 풀카운트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가르는 좌전안타를 때려냈다. 이 순간 주자 2명이 한꺼번에 홈을 밟아 스코어는 4-0. 김광현은 허탈한 표정으로 전유수와 교체됐다. 후속 고영민의 3루 땅볼을 SK 3루수 최정이 1루로 악송구해 정수빈 마저 득점했다. 승부가 사실상 갈린 순간이었다.
김재호 대신 정수빈을 선택한 SK 배터리의 결정은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수빈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타석에서 한결 성숙해진 정수빈의 인내심이 마지막 남은 힘까지 쏟은 김광현을 흔들었고, 두산은 결국 주중 3연전을 웃으면서 끝낼 수 있었다. 이날 경기의 게임 포인트였다.
정수빈은 올 시즌 두산에서 가장 달라진 선수로 꼽힌다. 무엇보다 타석에서 무척 침착해졌다. 과거 성급히 배트를 휘두르다 타율을 까먹던 모습에서 탈피했다. 이날 경기 전까지 10경기 성적은 타율 3할6푼 출루율 4할8푼4리에 달한다. 팀에서 오랫동안 기대하던 바로 그 모습이다. 지난해까지 프로 5년간 통산 출루율 3할3푼5리로 '발만 빠른 선수'라는 딱지를 서서히 떼고 있는 것이다.
정수빈의 변신 뒤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 겨울 붙박이 중견수 이종욱이 NC로 이적하면서 그는 일찌감치 주전을 예약했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한두 타석에서 못하면 다음 경기 출전명단에서 제외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연히 조급한 마음에 성급히 휘두르기 일수였다. 자신감과 성적 하락이라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러나 올 시즌은 상황이 달라졌다. 한두 경기 못한다고 해서 다음 경기 출전여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요즘 정수빈의 얼굴은 무척 편안해 보인다. 이날 경기 전에도 그는 "풀타임으로 뛰어보니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다"며 취재진과 농담을 주고 받았다. "왜 이리 잘 치느냐"는 말에는 "나도 모르겠다. 뭔가 이상한 것 같다"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가 얼굴 한 가득 번졌다.
이날 정수빈의 성적은 2타수 무안타 1볼넷 1타점. 그러나 경기의 행방을 가를 수 있는 승부처에서 번뜩인 그의 인내심은 호쾌한 안타 못지 않은 가치가 있었다.
조이뉴스24 잠실=김형태기자 tam@joynews24.com 사진 박세완기자 park90900@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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