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김지운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 장·단편 영화의 비중은 단연 흥미로운 대목이다. 지난 1998년 영화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한 이래 그는 같은 해 제작한 '사랑의 힘'을 포함해 총 7편의 단편 영화를 선보였다. 그가 내놓은 장편 영화의 수와 같다. 평단과 관객의 사랑을 두루 받아 온 중견 감독이 장편과 같은 수의 단편을 꾸준히 작업해 온것은 흔치 않은 케이스다.
지난 6월26일 개막해 2일 폐막식을 앞둔 제13회 미쟝센단편영화제-장르의 상상력 전(展)에서는 김지운 감독 단편 특별전을 기획, 감독이 직접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마스터클래스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지난 6월28일 진행된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한 김지운 감독은 단편 작업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각 단편 영화를 제작하던 시기의 고민들을 가감 없이 털어놨다.
올해 김지운 단편 특별전은 '충무로 10만원 비디오 페스티발'에 참여해 제작한 문소리·송강호 주연의 '사랑의 힘'(1998)부터 코오롱스포츠 40주년 기념 '웨이 투 네이처 필름 프로젝트(Way to Nature Film Project)' 2탄으로 제작된 '사랑의 가위바위보'(2013)까지 그의 단편 작업을 고루 훑어볼 수 있는 상영 리스트로 구성됐다.
흡혈귀를 소재로 한 신하균 주연의 디지털 단편 영화 '커밍아웃'(2000), 한중일 아시아 감독들의 협업과 김혜수의 출연으로 화제가 된 공포 옴니버스영화 '쓰리' 중 '메모리즈'(2002), 정우성과 김아중의 스파이 무비 '선물'(2009), SF영화 '인류멸망보고서' 중 '천상의 피조물'(2012)도 상영됐다.
제작 시기 상으로 가장 이른 작품은 '사랑의 힘'이다. 감독은 "'조용한 가족'을 만들고 나서 내가 생각했던 영화 제작 방식이 (현실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영화 밖에서 이뤄진 영화에 대한 많은 상상들, 영화를 만들며 생각했던 여러가지가 제도권 안에 들어오며 간섭과 통제의 대상이 되는듯했다"고 알렸다. 이어 "그 다음 단편부터는 제약과 구속 없이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에게 단편은 상업 영화계에서 종종 눌러담아야 했던 과감한 발상들을 마음껏 쏟아낸 분출구였다. 김지운 감독은 "내 스스로 영화를 만들며 검열하고 구속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런 의식 없이, 유희적으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단편 작업을 시작했다"고 알렸다.
'사랑의 힘'은 연인을 만나러 휠체어를 탄 채 서울로 떠난 한 여인(문소리 분)의 이야기다. 감독 특유의 엉뚱한 유머 코드가 사랑을 향한 시선과 재치있게 맞닿아있다. 몇 안 되는 등장 인물들 중 문소리의 휠체어를 물에서 꺼내는 남성 역은 당시 연출부 스태프가 연기했다. 감독은 "그 때 그 때 발생하는 일들을 가지고 영화"라고 제작기를 간추려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인터넷 기술의 초창기 온라인 영화로 기획된 '커밍아웃'은 성적 소수자의 커밍아웃과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뱀파이어의 고백에 빗대 그린 영화다. 감독은 "당시엔 과부하 탓에 버퍼링이 심해 사람들이 '영상 소설이냐'고 할 만큼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고 돌이켰다.
영화의 장르에 대해 "호러 문법과 재연극, 페이크 다큐멘터리에 그로테스크한 코미디까지 더해 가장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장르 혼합 영화였을 것"이라고 설명한 감독은 "뱀파이어가 말도 안되는 존재일 수 있으나 '우리가 성소수자를 그런 시각에서 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당시 내 시선도 영화에 들어있다"며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진실로 믿는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반어적 뉘앙스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 이후 주로 코믹 영화 연출을 제의받았던 김지운 감독은 호러 단편 '메모리즈'(2002)로 또 다른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영화는 신도시 아파트의 한 가족을 주인공으로, 이들 부부의 기억을 소재로 했다. 감독은 "신분 상승, 계급 상승을 충동질하는 욕구를 욕망으로 시뮬레이션하면서 변질된 존재들, 서로 잃어버렸던 상대에 대한 기억을 비유적으로 그렸다"고 설명했다.
'메모리즈'에서 본격적으로 호러 문법을 차용한 것에 대해선 "일부러 단편을 통해 내가 다른 장르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며 "전작들과 완전히 판이한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직후 그의 필모그라피는 수작 호러영화 '장화, 홍련'으로 이어진다. 단편을 통해 새로운 색깔을 선보인 감독은 그렇게 장르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감독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 '천상의 피조물'에 이어 첫 로맨틱 코미디 '사랑의 가위바위보'로 관객을 만나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것을 많이는 못해봤지만 '밀당'이라는 것이 일종의 서스펜스라고 느꼈다"고 고백한 김지운 감독은 "'내가 저 사람에게 뭔가를 줬을 때 저 사람이 내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은) 서로 숨겨왔다 내놓는 가위바위보같은 것이 아닐까?'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된 영화"라고 말했다.
이날 김지운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전 항상 장르를 먼저 생각한다"며 "장르 안에 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알렸다. 그에게 영화는 "두려움을 만드는 매체"다. "두려운 문제를 마주한 인간의 몸부림, 극복하거나 패배하거나, 둘 하나의 과정을 그리는 것이 영화"라는 것이 감독의 철학이다.
그는 "SF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호러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는 것 같다. 느와르는 인생의 비상과 추락을 다룬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장르의 관습을 영화적인 쾌감, 장르의 운동성으로 적극 받아들이며 내 이야기를 만든다"고 밝혔다.
"그런 의미에서 장르 선택은 곧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고, 내가 이야기할 거리를 선택하는 것이라 본다"는 감독은 "두 가지 생각과 목적으로 항상 장르를 생각했던 것 같다. 웨스턴, 호러, 느와르, 코미디 등은 다양한 인생의 형태와 모습을 담고 있다. 장르를 통해 내 이야기를 하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김지운은 미쟝센단편영화제와 오랜 인연을 자랑하는 감독이다. 지난 2002년 제1회 미쟝센단편영화제부터 함께 해 온 그는 지난 2011년까지 10년 간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2012년부터는 운영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화제 경쟁부문 다섯 개의 장르 가운데 공포 판타지 섹션을 뜻하는 '절대악몽'은 김지운 감독이 장준환 감독과 함께 만든 이름이다. 제13회 미쟝센단편영화제는 2일 오후 5시 폐막식을 앞두고 있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