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기자] 오재일(29, 두산)에겐 큰 마음의 상처가 있다. 과거 유망주로 각광받던 시절 한 야구인은 그를 보고 "사기를 당한 것 같다"며 웃었다. 기대가 컸지만 터질 듯 터지지 않는 잠재력에 실망만 했다는 의미였다. '아쉬움 반, 농담 반'으로 한 소리였겠지만 당사자인 오재일의 가슴엔 그 말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오재일은 거포로 대성할 자질을 타고 난 선수다. 187㎝ 100㎏의 거구에 스윙이 꽤 부드럽다. 타고난 힘에 타격의 정확성도 갖췄다. 꾸준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자기 몫을 해줄 선수로 꼽힌다. 더구나 그는 10개 구단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뛰어난 1루 수비능력을 갖췄다. 그가 1루를 지키고 있으면 두산 내야의 오른쪽은 안정감이 배가된다.
이런 오재일이지만 이전까지 확실히 자리를 잡지 못한 건 역시 타격의 기복 때문이다. 오재일은 잘 할 때와 부진할 때 편차가 큰 편이다. 지난 2013년 한국시리즈 2차전 연장 13회초 오승환(한신, 당시 삼성)으로부터 때려낸 결승홈런에서 알 수 있듯 기가 살 때는 MVP급 활약을 펼친다. 하지만 조금만 타격이 주춤하면 어김없이 슬럼프로 이어졌고, 이내 1군에서 제외되는 수순으로 전개됐다.
이유는 하나였다. 결국 자신감의 문제였다. 팀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고, 자신의 활약에 기대를 건다는 느낌이 들 때 그는 어김없이 맹타를 휘둘렀다. 오늘 하루 못쳐도 내일이 있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을 때 그는 '거포 1루수'의 면모를 톡톡히 드러냈다.
그러나 뭔가 쫓기는 느낌이 들 때면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림 없는 공에 헛스윙이 잦았고, 공을 침착하게 지켜보는 모습도 사라졌다. 마치 '이번에 보여주지 못하면 끝'이라는 듯 타석에서 허둥대다가 교체되기 일쑤였다.
그 어느 팀보다 치열한 주전경쟁, 특히 힘있는 1루수가 즐비한 두산 팀내 사정을 감안하면 그의 '조바심'엔 이유가 있었다. 조급한 마음은 부진으로, 부진은 슬럼프로 이어진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자신감은 한순간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올스타 휴식기까지 이런 악순환의 연속이었던 오재일은 그러나 후반기 들어 전혀 다른 선수가 됐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치른 5경기서 거의 매번 홈런을 쳐내는 등 후반기 타율 4할6푼7리(15타수 7안타) 4홈런 9타점으로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멀티히트를 3차례나 기록하는 등 정교함까지 더해지면서 하위 타선의 '다이너마이트'로 자리매김하는 모양새다.
올 시즌 두산 1루수 경쟁은 혼돈의 연속이다. 시즌 초 김재환이 주전 자리를 굳히는 듯하더니 지난 6월 로메로가 합류하면서 구도가 묘해졌다. 여기에 2군의 4번타자 유민상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로메로의 1루 수비능력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수비가 좋은 오재일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오재일은 여름 들어 무서운 타격으로 점차 팀내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두산 1루경쟁의 승자는 오재일이 될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만만찮은 장타력과 특출난 수비능력을 겸비한 1루수를 두산은 오랫동안 갈망해왔다.
오재일은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준비를 소흘히 하지 않았다"며 "경기에 나가면서 자신감이 생겼고, 마음도 차분해졌다. 덕분에 요즘 좋은 타구가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즌 타율 2할9푼9리(67타수 20안타) 5홈런 11타점. 24경기 75타석의 제한된 기회일 뿐이지만 20안타의 절반인 10개가 장타다. 자신감이란 최고의 무기를 장착한 오재일이 후반기 대질주를 약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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