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필기자] 2015년, 한국 축구에 새롭게 등장한 희망의 아이콘은 단연 이정협(24, 부산 아이파크)이었다. 편견과 싸워왔던 무명의 공격수가 국내 축구팬들에게 무명에 가까웠던 독일인 울리 슈틸리케(61) 감독을 만나 성장하는 과정은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인터넷 신문이라는 편견을 뚫고 11년을 달려온 조이뉴스24의 성장기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창간 11년주년을 맞은 조이뉴스24가 그동안 쉽게 들을 수 없었던 이정협의 축구 성장기를 소개한다.
'이정기는 동래고-숭실대 출신이라 출전 걱정이 없다.'
'골도 넣지 못하는 공격수를 계속 쓰는 것 보면 윤성효 감독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
2013년 이정기라는 이름으로 부산 아이파크에 입단한 이정협(24)은 그 해 27경기에서 2골 2도움에 그쳤다. 데뷔 첫해라는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더 높은 순위를 기대했던 일부 부산 팬 입장에서는 신인 이정협의 잦은 기용에 대해 의심을 품을 만했다.
실제 당시 구단 게시판 등에는 이정협에 대한 의혹의 글도 올라왔다. 외부에서도 이상한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부산의 한 축구인은 기자에게 "이정협은 윤성효 감독 덕분에 기회를 얻고 있다. 다른 구단이었으면 택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흉을 봤다. 동래고 출신에 숭실대 지휘봉을 잡았었던 윤 감독과의 학연이 작용했다는, 단순한 논리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감독과 출신교 같다는 이유로 불신에 시달린 이정협
이정협과 같이 뛰었던 A선수도 비슷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는 "어느 날 경기가 끝난 뒤 나가는데 한 축구 지도자가 이정협을 향해 '네가 뛰는 것은 동래고-숭실대를 나와서 그런 거다'라고 하더라. 듣는 나도 기분이 나빴는데 (이)정협이가 어땠을까 싶다. 신인이라 정신도 없는데 압박이 컸을 것이다. 다들 한 귀로 흘리라며 위로했다"라고 전했다.
이정협에 대한 부담스러운 소문을 모를 리 없었던 윤 감독은 그에게 상주 상무 입대를 권유했다. 마침 양동현도 상주에서 부산으로 돌아와 팀내 입지가 좁아졌다. 병역 해결과 동시에 상무에서 좋은 선수들과 함께하며 더 배우고 온다면 달라지리라는 윤 감독의 계산도 깔렸었다.
한때지만 이런 암울한 과거를 안고 있었던 이정협은 조이뉴스24 창간 11주년 인터뷰에서 그와 관련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자도 그 이야기를 물으려다 참았다. 대신 그와 함께 뛰었던 유스 동기들의 근황이 궁금했다.
부산 유스 출신 가운데는 울산 현대, 포항 스틸러스, 전남 드래곤즈 등 명문 유스와 비교해 국가대표 찾기가 별 따기에 가깝다. 유스팀 학교 지정이 늦었고 동네북 신세였기 때문이다. 올해 국가대표에 갔었던 주세종, 이범영 모두 타 고교 출신이다. 이정협이 부산 유스 출신의 희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축구를 관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자영업을 하거나 일반 회사에 들어가기도 했고 결혼을 한 친구들도 있다. 다들 열심히 뛰었었는데 끝까지 같이 가지 못해 안타깝더라"라고 말했다.
"친구들에게 희망을 주게 됐다"라는 말을 건네자 이정협의 눈은 금방 붉게 물들며 눈물을 글썽였다. 동기들 생각에 그의 마음이 요동친 것이다. 괜히 기자도 미안해졌다.
이정협과 함께 축구를 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간 동기는 수비수 권진영 1명뿐이다. 중, 고, 대학 동기로 어려울 때마다 믿고 찾는다. 권진영도 2013년 3경기, 2014년 4경기 출전이 전부다. 그도 상주 상무에 갔지만 부상 등으로 올해 단 1경기 출전에 그쳤다. 농담처럼 "상주에서 전화 받는 임무를 더 많이 한다더라"라며 웃었다.
"(권)진영이도 고생하고 있다. 열심히 뛰었으면 좋겠다. 국가대표 발탁되니까 정말 기뻐해 주더라. 축구를 관둔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나 때문에 다시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 친구들도 있더라. 그들 때문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부산 관계자는 "이정협과 권진영은 정말 잘 붙어 다녔다. 구단에서도 유스에서 함께 올라와 프로가 된 선수들이라 각별하게 생각했었다. 둘 다 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라고 전했다.
축구를 그만둔 친구들과 후배들의 희망이 되기 위해 뛴다
이정협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또 있다. 얼마 전 KBS2 TV에서 방영됐던 '청춘FC 헝그리일레븐'을 통해 새로운 축구 인생에 도전했던 이들이다. 두각을 나타내며 열성 팬들을 불러 모았던 챌린지(2부리그) FC안양 출신 염호덕이 덕천중학교 후배고,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안타까운 말을 남기며 연습 경기를 앞두고 부상으로 팀을 떠나야 했던 이제석이 숭실대 후배다.
이정협은 "나중에 청춘FC를 봤다. (염)호덕이와 (이)제석이랑 인연이 있다.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 실력이 없는 애들도 아니라 더 그렇다. 특히 제석이의 부상은 안타깝더라. 축구를 하다가 보면 다칠 수 있기는 하지만 정말 마음이 무겁더라"라며 자기의 일처럼 걱정했다. 언젠가는 같은 무대에서 뛰었으면 하는 것이 이정협의 마음이다.
뜨거운 한 시즌을 보내고 있는 이정협은 전역 후 부산에 복귀해 클래식 잔류라는 막중한 임무를 소화해야 한다. 국가대표는 다음 문제다.(인터뷰 당시는 11월 A매치 명단 발표 전이었다.) 팀에서 잘 해야 국가대표도 가능하다는 논리는 여전히 이정협을 관통하고 있다. 이정협은 "부상으로 대표팀에 가지 못했어도 병원에서 TV로 다 봤다. 사람들이 포지션 경쟁자라고 말하는 (김)신욱이 형에게도 많이 배웠고 석현준, 황의조 모두 잘 하더라.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라고 말했다.
슈틸리케 대표팀 감독은 지난 9월 경기도 화성에서 열린 라오스와의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서 부상으로 제외됐던 이정협과 골키퍼 김진현을 특별히 언급했다. 두 선수가 부상에서 빨리 회복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없는 선수도 챙기는 슈틸리케 감독의 세심함을 이정협도 알고 있었다.
그는 "감독님은 나 말고도 선수들을 살뜰히 챙기신다. 용기도 불어넣어 주신다. 정말 섬세하시다. 그런 분 앞에서 열심히 뛰지 않으면 안된다. 선수들을 믿고 계신다"라며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우연처럼 이정협과 인터뷰하던 부산 클럽하우스 시청각실에는 변명기 사장이 걸어놓은 중국 최고의 문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도연명의 '잡시' 시구가 걸려 있었다. 시를 읽던 이정협에게 "지금 상황과 딱 맞는 시처럼 느껴진다"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盛年不重來(성년부중래)-젊은 시절은 거듭 오지 않으며
一日難再晨(일일난재신)-하루에 새벽(아침)이 두 번 오지는 않으니
及時當勉勵(급시당면려)-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다.
歲月不待人(세월부대인)-흘러가는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
이정협도 도연명의 시구처럼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부산도 대표팀도 그에게는 여전히 도전해야 하는 팀이다.
<끝>
조이뉴스24 부산=이성필기자 elephant1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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