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시나리오를 읽고 며칠이나 쉽게 잠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영화계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한 동료 기자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영화의 대본을 굳이 구해본 과거의 자신을 때려주고 싶다고 고백했다. 덕분에 비만 오면 등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든다고도 했다. 나홍진 감독의 신작 영화 '곡성'을 둘러싸고 일찌감치 퍼진 이야기들이다.
나홍진은 '추격자'(2008)와 '황해'(2010), 단 두 편의 영화로 충무로를 넘어 세계 장르영화계에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각인시킨 감독이다. 그가 약 5년 만에 내놓는 신작이니, '곡성'(감독 나홍진, 제작 사이드미러, 폭스 인터내셔널 프러덕션(코리아))을 둘러싼 뜨거운 관심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리고 지난 3일 열린 영화의 언론 배급 시사 후 쏟아진 호평과 함께, 기대는 보기좋게 현실이 됐다. 감독은 '곡성'을 통해 자신의 영화적 지평을 한 뼘 더 넓히는데 성공했다.
'곡성'은 외지인이 나타난 후 시작된 의문의 연쇄 사건 속 소문과 실체를 알 수 없는 사건에 맞닥뜨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곡성의 평범한 경찰 종구(곽도원 분)는 마을에 연이어 발생하는 흉흉한 사건들을 목도하며 섬뜩함을 느낀다. 어느 이웃은 갑자기 목숨을 잃고, 또 누군가는 실성을 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피부가 벌겋게 부어오르는 두드러기다. 하지만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마을에 인간도 귀신도 아닌 기이한 존재가 있다는 풍문까지 떠돌면서 공기는 더욱 을씨년스러워진다.
마을의 소문은 끔찍한 사건들의 범인을 우회적으로 지목한다. 일본에서 온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이 그 의심의 대상이다. 얼핏 그는 낚시를 즐기며 촌락의 정취를 즐기는 여행자로도 보이지만, 우연히 무명(천우희 분)의 증언을 들은 종구는 이 외지인을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딸 효진(김환희 분)이 끔찍한 사건 속 이웃들처럼 의문의 언행을 시작하면서, 종구는 외지인을 향한 불안과 분노를 폭발시킨다.
감독의 전작 '추격자'와 '황해'의 긴장감이 주로 특수하면서도 현실적인 상황과 사건, 혹은 캐릭터의 파괴력에 기인했다면 '곡성'의 장르적 장치는 그 모든 것에 우선해 이미 존재한다. 영화의 정서를 가로지르는 것은 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의 잔혹성이 아닌, 무속, 가톨릭, 제노포비아 등 사건과 인물의 아래 뿌리처럼 박혀있는 세계관이다. '곡성'을 통해 감독의 확장된 영화적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점차 심각해지는 효진의 증세를 두고볼 수 없던 종구의 가족이 용한 무당이라는 일광(황정민 분)의 등장을 허락하면서, 의문에 싸여 있던 '곡성'의 사건들은 일차적인 구체성을 얻게 된다. 마을에 이어진 사건들의 원인은 일순간 일광의 시각에서 설명된다. 관객은 힌트인지 함정인지 모를 그의 대사들을 통해 주인공 종구와 함께 진실의 주변을 맴돌게 된다.
외지인을 추궁하는 종구가 통역을 위해 대동한 가톨릭 부제의 내적 갈등 역시 '곡성'이 취한 영리하고 과감한 장치다. 가톨릭의 가르침 아래 신부가 되려 했던 부제는 종구와 동행하며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겪고 혼란에 빠진다. '곡성'의 시작을 장식한 누가복음 24장 37~39절의 내용은 섬뜩한 공포의 외피 아래 결말에서도 암송된다. 영화가 비극의 바탕으로 제시하는 믿음과 의심의 양면은 결국 부제의 고민이자 관객의 고민이 된다.
15세이상 관람가로 분류됐지만, '곡성'의 기괴하고도 독창적인 서스펜스는 청소년관람불가로 개봉한 나홍진의 두 전작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괴물 감독'으로도 불려온 나홍진의 연출력에 더해 배우들의 흠 잡을 곳 없는 열연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간 주로 악역이자 조연인 캐릭터로 실력을 입증해온 곽도원은 첫 주연작인 '곡성'을 통해 뜨거운 페이소스를 뿜어냈다. 코믹과 절절함을 오가는 인물의 입체성 역시 촘촘하게 그려냈다.
영화의 중반 이후에야 첫 등장하는 배우 황정민의 활약 역시 영화를 보는 큰 재미다. 실력파 배우로 손꼽히는 그가 최근작들에서 어떤 전형적 이미지로 소비돼 온 것에 아쉬움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곡성'은 그 갈증을 충분히 해소해 줄 작품이다. 특히 살(煞)과 살의 충돌을 그려내는 일광의 굿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어느 작품에서나 인물에 녹아든 연기를 펼쳐 온 배우 천우희는 '곡성'에서도 무리 없이 관객을 끌어당긴다. 특히 '베드로의 부인'을 떠올리게 하는 종구와의 대화 신이 인상적이다. 종구의 딸 효진 역의 김환희는 아역이라는 수식어를 떼고 봐도 무관할 빼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일본 배우 쿠니무라 준의 연기에 대해선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영화의 엔딩이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다.
영화는 제69회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오는 11일 전야개봉한다. 러닝타임은 156분.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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