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무대에 오르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배우 이민지의 얼굴은 마냥 밝았다.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 수상자로 선정돼 폐막식 전날 다시 부산을 찾은 그는 소녀처럼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수상 기념 인터뷰에 참석했다. 지난 14일 밤 열린 '비전의 밤' 시상식에서 잠시 만난 뒤 이튿날 다시 인터뷰 자리에서 기자들과 마주한 그는 사석에서와 같이 장난스러웠고 해맑았다.
하지만 불과 6시간 뒤 진행된 폐막식, 심사위원 조민수에게 이름이 호명된 뒤 무대에 오른 이민지의 눈가는 촉촉했다. 차분하게 소감을 말하고 의연하게 트로피를 쥐었지만, 아이처럼 맑은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지난 15일 폐막한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 초청작 '꿈의 제인'은 무려 3개의 트로피를 거머쥐며 올해 영화제의 최고 화제작임을 입증했다. CGV아트하우스상과 올해의 배우상 남녀 부문을 독식하며 영화계에 또렷한 존재감을 남겼다. 기댈 곳 없는 가출 소녀 소현(이민지 분)이 꿈결같은 희망 제인(구교환 분)을 만나게 되며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소현 역 이민지와 제인 역 구교환은 지난 2014년 '들꽃' 조수향과 '거인' 최우식, 2015년 '소통과 거짓말' 장선과 '혼자' 이주원에 이어 올해의 배우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올해 배우 조민수와 김의성이 각각 심사를 맡은 부문이다. 3회 째를 맞은 배우상 시상 부문에서 한 작품의 남녀 배우가 상을 모두 차지한 것은 처음이다.
조민수는 극 중 가출소녀 소현 역을 연기한 이민지에게 상을 안기며 "버려지는게 두려워 겉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맞춤형 인간으로 살아가는 소현을 만들어낸 배우 이민지에게선, 터져나올 앞으로의 연기들이 기다려진다"는 심사평을 전했다. 인터뷰 자리에서 처음 서면으로 심사평을 접한 이민지는 "너무 좋다"는 말을 뱉은 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림자 같은 인간이라니, 이런 표현을 하시다니…"라며 감격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실 이민지는 이 업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실력파 배우다. 특히 단편영화계에서 이민지의 이력은 여느 유명 감독들 못지않다. 국내 감독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단편 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문병곤 감독의 '세이프'(2013) 속 불법 환전소 아르바이트생이 바로 이민지다.
주연을 맡은 단편 영화 '부서진 밤'(감독 양효주, 2010)은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고 '애드벌룬'(감독 이우정, 2011)은 이듬해 같은 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또 다른 출연작 '달이 기울면'(감독 정소영, 2013)은 제12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박찬욱감독특별상 수상작이다.
하지만 그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린 작품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일 것이다. 교정기를 한 코믹한 캐릭터, 안재홍과 사랑스러운 로맨스를 그려낸 장미옥(별명은 장만옥) 역을 통해 시청자를 만났다.
그리고, 또 영화다. '꿈의 제인'은 그가 '응답하라 1988' 촬영과 병행하며 찍은 작품이었다. 편히 잘 시간도 없이 작업했지만, 이 작품은 배우 이민지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줄 영화로 남았다.
"(29세라) 아홉수를 겪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가올 30대의 운이 여기 다 쓰인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며 웃어보인 이민지는 "아직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벅찬 소감을 알렸다.
이하 '꿈의 제인'으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 배우 이민지와의 일문일답
-처음 수상 소식을 알게 됐을 때의 기분이 궁금하다.
"진짜 아무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2010년부터, 단편영화 작업 때부터 부산국제영화제에 쭉 있었는데 장편으로는 올해 처음 왔다. 게다가 감독님들이 상 받는 것만 봤지, 폐막식엔 있어본 적도 없었다. 묘하더라. '내가 저 위에서 수상소감을 말할 날이 있단 말인가' 싶었다. 아직도 실감이 안난다. 무대에 올라갈 때까지는 상을 받는다는 것도 실감이 안날 것 같다. 단편부터 장편까지 영화제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조금 더 성장했다는 느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키워진 느낌이 든다.
사실 조성희 감독님이 연출한 '짐승의 끝'이라는 영화에서 상대역이 박해일 선배님이라는 이야길 듣고 '내 20대 운은 여기 다 썼구나'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은 다가올 30대의 운을 이 상으로 다 쓴 건 아닌가 싶다.(웃음)"
-모습은 여전히 소녀 같지만, 나이는 올해 29세다. 10대 가출 소녀 역을 연기하기엔 어땠나.
"10대 역은 도전이었다. 가출 청소년을 연기하는 것보다 10대인 것을 표현하는게 더 힘들었다. 감독과도 그 이야기를 계속 했다. 20대 초반부터 목소리에서 연륜이 느껴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걱정이 됐다. 다른 것 말고, 소현이를 10대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가장 신경쓰였다. 소리를 아이처럼 내려고 연습도 많이 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응답하라 1988'을 찍을 때라 그 작품에서와 같은 머리 스타일이 한몫을 해준 것 같다.
전작에서도 여고생 역을 많이 하긴 했다. 소햔과 비슷한, 감정표현보단 내면으로 보여줘야 하는 단편을 많이 했기 때문에 감독이 나를 선택해준 것 같기도 하다. 당시 감독님도 소현 역을 찾는 데 힘이 들었던 상태라고 하더라. 거의 마지막에 가깝게 연락이 왔다. 그간 했던 단편들 덕에 같이 작업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유수의 단편에 많이 출연한 것으로 유명하다.
"생각보다 많이 찍진 않았는데 운 좋게 다 잘 돼서 엄청나게 많이 찍은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웃음) 6~7년 간 많이 찍어야 10편 내외로 찍었다. 운 좋게 작품들이 잘 됐을 뿐이다. 아직 많이 찍어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도 단편 작업을 많이 하고 싶은데, 작품이 큰 곳에서 상을 받고 하니 연락이 끊기기 시작하더라. '이런 작품들을 해 왔으니 우리가 부르면 안 할거야'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직도 단편, 독립영화 작업을 계속 하고 싶다. 요즘 찾아주시는 분들이 줄어 살짝 아쉽다.(웃음)"
-구교환과의 호흡은 어땠나? '꿈의 제인'으로 함께 상을 받게 돼 기분이 남다를 것 같다.
"연기를 같이 한 건 처음이다. '뎀프시롤:참회록'이라는 단편에 둘 다 출연했지만 함께 연기하는 장면은 없었다. (구)교환 오빠도, 나도 단편부터 시작했으니 영화제 술자리에선 많이 봤다. 서로 인간관계에 교집합이 커서 두루 친한 편이다. 교환 오빠의 연출작도, 연기를 한 작품도 다 좋아해서 한번 쯤 함께 연기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꿈의 제인'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을 때 무조건 하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 함께 작업해 많이 친해졌다. 상도 같이 받으니 너무 좋다. 구교환은 '독립영화계의 주성치'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런 에너지를 영화로 푸는 사람이라, 참 재밌다. 언젠가 다시 함께 작업하고 싶다. 조현철, 박정민, 박종환 등 교환 오빠와 친한 '패밀리'가 있는데, 그들과도 다시 함께 작업하면 좋겠다."
-'가출팸'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사전에 어떤 준비를 했는지도 궁금하다.
"영화를 준비 하면서 많은 자료를 보진 못했다. 드라마와 병행하느라 잠을 잘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감독님과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현실이 암담할 정도더라. 내가 이것을 연기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최대한 누가 되지 않게 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소현 역은 극의 화자 느낌도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만큼 제인과 지수(이주영 분)를 돋보이게 해줘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감정을 연기하는 데 있어 너무 과하게 하면 그 둘의 존재감에 방해가 될 수 있겠더라. 무난하게 화자의 느낌으로 끝까지 가되, 튀지 않는 것이 목표였다. 소현은 감정 표현도 잘 하지 않고 표정도 무미건조하지 않나. 영화를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소현이 끝까지 등장해 밋밋해보일 수 있는 지점들을 관객들이 좋게 이야기해주셨다는 점이다. 일반 상업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이 보기엔 '이게 연기를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었는데, 그 사이에 있는 감정들을 많이 봐주셨다는 점에 안도감이 들었다."
-다음 작품 계획도 궁금하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작품을 가리고 싶지는 않다. 이젠 '꿈의 제인'에서처럼 내적인 연기가 아닌 살짝 표출할 수 있는 인물을 그리고 싶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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