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 추악한 범죄, 은폐된 진실, 사회악 응징과 정의 구현, 부패권력 처단...'. 법정물에서 흔히 보아오던 그림들이다. 법정을 가득 채운 팽팽한 긴장감과 짜릿한 판결은 필수 요건, 미드의 '스타일리시함'을 쫓는 드라마들이 넘친다. 법정물은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미스 함무라비'는 기존 법정물과 노선이 다르다. 판타지 대신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사건 대신 사람이 부각된다. 짜릿한 사이다 판결과 법정 '히어로'는 없을지 몰라도, 사람을 마주하는 현실 판사들의 고민과 이상은 있다. 현실 위에 뿌리 내린 '공감' 법정물의 탄생했다.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법원'을 꿈꾸는 이상주의 열혈 초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 분), 섣부른 선의보다 원리원칙이 최우선인 초엘리트 판사 임바른(김명수 분), 세상의 무게를 아는 현실주의 부장 판사 한세상(성동일 분), 달라도 너무 다른 세 명의 재판부가 펼치는 생활밀착형 법정 드라마다.
현재 2회까지 방영된 드라마는 '이상주의' 박차오름과 '원칙주의' 임바름, 극과 극 가치관을 지닌 '민사 44부' 두 인물을 비추며 시작했다.
초임판사 박차오름의 첫 출근길. 지하철 '쩍벌남'과 고성 통화로 사생활을 중계하는 아줌마에게 일침을 놨고, 여학생 성추행범을 목격 하고서는 니킥을 날렸다.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않는 정의감 그녀가 시청자들에게 날린 첫 '현실 사이다'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똘끼'도 지녔다. 한세상(성동일) 부장판사가 "여학생이 조신하게 입고 다녀야지"라고 성차별적 소리를 하자 보란 듯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출근하는가 하면 아예 히잡으로 갈아입고 나타나 그를 뒷목 잡게 했다. 튀는 사람이 버티기 힘든 조직, 그러나 "불평하기보다 부딪히겠다"고 말하는 '용감한 돌아이' 박차오름의 인상적인 신고식이었다.
반면 임바름은 '머리'로 먼저 생각하는 엘리트 판사다. 고등학교 선배라는 구실로 재판 청탁을 하러 온 국회의원에게 "부정청탁으로 신고하겠다"고 거절하고, 국회의원 면전에 "제 옷을 벗기려면 좀 더 노오오력 하시죠"라고 돌직구를 던졌다. "이놈의 직업을 평생 한다는 건 인간 혐오와 함께 평생 살아간다는 것"이라며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아들내미가 판사라더니 별것 없네"라는 집주인 말처럼, 엘리트 판사 이면에는 팍팍한 가정 형편과 300만원이 조금 넘는 월급 통장을 바라보며 한숨 짓는 고단한 청춘이기도 하다. 해직 기자 출신 아버지가 경제 능력 없이 이상만 쫓는 모습을 보고 자란 그의 성장사를 안다면, 충분히 공감되는 인물이다.
이렇듯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생각이 부딪히는 지점은 흥미롭다. 예컨대 임바름은 법관의 임무를 "어차피 바뀌지 않을 세상 더 시궁창 되지 않게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어설프게 옹호하지 않고, 냉정하게 룰대로 하라고. 반면 박차오름은 "시궁창에 빠진 사람과 땅위에 선 사람이 싸우고 있다면, 시궁창에 빠진 사람 구해보려고 허우적 대겠다"고 한다. 그게 설령 어설프다고 할지라도. 날카로운 설전, 두 사람의 대화 끝에는 고민하고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놨다. 현실과 이상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딜레마이기에.
드라마 제목 '미스 함무라비'에 답이 있듯, 고아라가 연기하는 박차오름 캐릭터는 우리가 보아온 법정물과 가장 큰 차별점을 만드는 인물이다. 밝고 씩씩하고, 정의감과 의리감 넘치는 주인공은 이전에도 많았지만, '사람을 향한 존중'이 더해진 예쁘고 고마운 캐릭터다.
초임 검사라 서툰 실수도 하고, 중립성을 잃기도 한다. 연수원 시절 교수를 피고 측 변호인으로 만나자 재판장에서 친근한 눈인사를 나누고, 채무자 할머니의 사연을 들어주려다 되려 이용 당했다. 법정 피고인들의 사연에 눈물을 훔친다. 그런 박차오름에게 한세상은 "그 옷을 입은 의미를 전혀 모르는 구만"이라고 한심해하고, 임바름은 "대한민국 판사에겐 개인감정 따위 드러낼 권리 없다"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민폐 캐릭터'로 느껴지지 않는 건, 시청자들이 박차오름의 신념과 선의를 존중하고 응원하기 때문이다. "이 옷을 입으면 감정을 지워야 하나. 사람이면서 동시에 판사일 거다.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판사가 되지 않을 거다. 다 제일처럼 여길 것"이라는 마음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판장에서 딱딱하고 무거운 표정의 판사가 아닌, 이야기를 들어주는 판사를 만나고픈 우리들의 '현실 판타지'이기도 하다.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판사 박차오름의 고군분투는 작은 변화를 이끌었다. 의료사고로 1인 시위하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항소할 수 있도록 '현실' 도움을 주며 훈훈함을 자아냈다. '고깃집 불판' 사건에서는 장애아를 둔 부모의 마음과 타지에서 식당일을 하고 있는 종업원과 주인, 원고와 피고 양측의 상황을 헤아렸다. 결국 원고는 조건 없이 소 취하하며 최상의 결과물을 냈다. 앞서 형식적인 합의를 종용했던 부장판사가 반성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박차오름의 신념은 '민사 44부'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임바른은 "법복을 입으면 사람의 표정은 지워야 하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지원서는 안되는 거였다. 보지 못했다. 마음으로 보면 볼 수 있는 것을"이라며 자신을 되돌아봤다. 한세상도 초임 시절 자신에게 법복을 입혀 주며 "잘 듣는 판사가 되시오. 판단하기 전에, 먼저 조용히, 끝까지"라고 독려하던 선배 판사를 떠올렸다. 법복의 무게감이 주는 사명감과 소명의식, 그 안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를 시청자들에 오롯이 전달했다.
'미스 함무라비'는 집필한 문유석 판사는 현직 부장판사다. 살인, 절도 등 형사 사건이 아닌 사람에 집중하는 민사 재판을 통해, 우리 주위에 있을 법한 소소하지만 피부에 와 닿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풀어냈다. 재판 과정부터 판사들의 삶까지 세밀하고 생생하게 담아냈다. 현실과 이상의 딜레마에 대한 깊숙한 고민도 투영됐다. 대사 하나 하나에 곱씹을 만한 메시지들이 차고 넘친다. 분노와 좌절을 겪고 있는 이 시대에 '희망'을 키워드로 던지고 싶었다는 문 판사의 기획의도는, 이 드라마를 계속 보고 싶게 만든다.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 '미스 함무라비'의 고아라와 김명수의 로맨스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전개에 '깨알재미'를 안기고 있다. 학창시절 서로를 짝사랑 했던 그들이 판사로 다시 만났다. 입으로는 싸우고 있지만, 어쩐지 그녀에게 계속 시선을 두게 되는 김명수의 '츤데레' 매력이 잔잔한 설렘을 선사한다. 그의 눈빛을 알듯 모를듯 쳐다보는 고아라는 여전히 매력 넘치고 사랑스럽다.
'운명적 재회' 등 거창한 러브라인은 없다. 대신 다른 시간을 살며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된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포용하며 관계를 변화해 가는지, '현실 연애'의 또다른 모습들이 담겨지길 기대한다. 다만 방향성을 잃고 '법원'에서 연애만 하는 드라마가 되지는 않길.
조이뉴스24 이미영기자 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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