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박찬욱 감독이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로 국내 관객을 만난다. 한국과는 시스템이 다른 낯선 촬영 현장과 의사 소통의 문제 등 물리적 장벽들은 많았지만, 섬세하고 진지한 그의 작업 방식은 빡빡한 촬영 일정도, 언어의 장벽도 뛰어넘어 한 편의 수작을 완성했다.
21일 서울 남산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영화 '스토커' 공식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출을 맡은 박찬욱 감독과 주연 배우 미아 바시코브스카가 참석했다.
박찬욱 감독은 "미국 영화지만 한국 감독이 만든, 어정쩡한 영화 같기도 하다"고 웃으며 운을 뗀 뒤 "저 나름대로는 낯선 땅에 가서 외로웠고 한국 음식도 못 얻어먹는 등의 어려움이 있었다"고 작업 당시의 힘들었던 점들을 떠올렸다.
이어 박 감독은 "그런 영화가 이렇게 만들어져 조국에서 공개하게 돼 감개무량하다"고 덧붙이며 "만드는 동안은 일에 쫓겨 정신없이 바빠 힘들었다면 완성하고 개봉을 앞두고 있으니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스토커'는 오는 28일 한국에서 개봉한 뒤 3월1일 미국 5개 도시에서 개봉한다. 박찬욱 감독은 "와일드릴리즈 방식이 아니어서 시작할 때는 5개 도시에서만 개봉한 뒤 3주 쯤 되면 50개, 이후엔 300개 등으로 개봉관이 늘어나는 식"이라고 미국에서의 상영 방식을 설명했다.
"영화의 반응이 어떤지에 (개봉관 수가) 달려 있다"고 강조한 박 감독은 "반응이 좋을수록 더 많은 도시의 많은 스크린에서 걸리게 된다"며 "제 입장에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한 명이라도 많은 관객들에게 접근이 가능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날 박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 미아 바시코브스카를 향해 전폭적인 신뢰를 드러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바시코브스카를 "연기를 잘 한다고 내세우거나 과장하지 않는, 연기를 자랑하듯 하지 않는 배우"라고 설명했다.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영화 '제인에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스트리스' '로우리스:나쁜 영웅들' 등에서 강렬한 연기를 펼쳤다. '스토커'에서는 18세의 신비로운 소녀 인디아 역을 맡아 오묘한 매력을 뽐냈다. 1989년생,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이다. 지난 20일 3박4일 일정으로 내한했다.
박 감독은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언뜻 화려하지 않아 심심해 보일 수 있는 배우지만 영화가 긴 시간동안 차츰 쌓아올리는 작업임을 잘 이해하는 배우"라며 "자기 역뿐 아니라 영화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이어 "젊고 욕심 많은 배우들은 자기가 나오는 모든 샷마다 가진 것을 다 발휘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다"며 "미아는 기다릴 줄 알고, 때로 영화 전체를 봤을 때 가만히 있는 게 좋다는 것을, 나중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판단할 줄 안다"고 말했다. "연기를 절제할 줄 알기 때문에 관객이 가까이 가고 싶어하고 주목하게 된다"며 "그런 면에서 관객 개인의 우위에 설 줄 아는 배우"라고도 평했다.
영화는 바시코브스카와 니콜 키드먼, 매튜 구드 등 출중한 배우들의 출연으로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다. 박 감독은 외로웠던 타지에서의 작업에 기쁨을 준 것들을 이야기하며 함께 작업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는 "미국에서 일해 좋았던 것은 미아 바시코브스카 같은 배우를 만난 것"이라며 "한국에도 좋은 배우들이 많지만 미아는 없지 않냐"고 입을 열었다.
이어 "니콜 키드먼도 그렇고,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좋았다"고 덧붙인 박 감독은 "영화 속 피아노 음악을 만든 필립 글래스라는 작곡가는 제가 어릴 때부터 숭배하다시피 한 인물"이라며 "음악 감독 클린트 멘셀 역시 10년 전쯤 '파이'라는 영화의 음악만으로 저를 충격에 빠뜨렸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빡빡했던 할리우드의 촬영 현장은 박찬욱 감독을 진땀 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미국 작업에서 느낀 단점을 꼽자면 너무 바쁘다는 것"이라며 "한국에서 '몇 회 정도겠다' 싶은 것의 절반 정도밖엔 시간이 없었다"고 촬영 당시를 회고했다. 박 감독은 "처음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초 단위로 진땀을 빼며 겨우 겨우 찍었다"고 말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박찬욱 감독은 유려한 미장센과 캐릭터의 심리를 따라가는 섬세한 연출로 박찬욱표 스릴러 '스토커'를 완성했다. 그는 "미국에서 작업을 제의한 것은 제 개성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라며 "그들도 그걸 존중해줬고 마음껏 발휘하길 원했다"고도 설명했다. 이어 "굳이 영어도 못 하는 이를 데려다 찍게 한 것은 잘 하는 것을 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잘 하는 것을 해줬다"고 웃으며 말했다.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감독과 처음으로 작업한 소감을 말하며 박찬욱 감독과 호흡에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박찬욱 감독은 제가 작업했던 다른 감독들과는 달랐다"며 "처음에는 통역을 통해 영화를 찍게 되면 어찌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며칠 지나니 서로 통역을 통해 작업하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무척 자연스러웠다"며 "그런 것들(언어 문제)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바시코브스카의 마음을 건드린 것은 박찬욱 감독의 남다른 섬세함이었다. 그는 "박 감독에게 제가 특히 감동받았던 부분은 굉장히 섬세하다는 점"이라며 "장면을 의도하거나 은유법을 쓸 때 굉장히 많은 시간 생각을 해서 독특한 장면들을 만들어낸다"고 감탄을 표했다. 이어 "(그런 장면들이) 스토리와도 맞아 떨어진다"며 "이것이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박찬욱 감독과의 작업은 멋졌다"며 "다른 감독님들과 한 작업들과는 다른 경험이었다"고도 말했다. 이어 "박 감독이 촬영 시작 전에 스토리보드를 통해 이미지들을 보여줬다. 세세한 장면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줬는데 굉장히 섬세하고 디테일했다"며 "은유법을 활용해 설명해줬고 배우들의 생각이 어떤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이를 반영해줬다. 정말 멋지고 좋았다"고 덧붙였다.
'스토커'에서 미아 바시코브스카가 연기한 18세 소녀 인디아는 히스테리컬한 눈빛과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인디아는 갑자기 나타난 삼촌 찰리(매튜 구드 분)와 묘한 감정을 주고받으며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바시코브스카는 "제가 '스토커'에 출연하게 된 이유는 인디아라는 인물이 복잡 미묘한 인물이어서 매료됐기 때문"이라고 운을 뗐다. "전에 연기했던 다른 인물들과 굉장히 달라 매력적이었다"고도 강조했다.
바시코브스카는 인디아가 삼촌 찰리, 동급생 윕과 겪었던 사건을 돌이키며 샤워 중 자위 행위를 하는 연기를 소화했다. 그는 "일부 장면들은 찍기 전에 스토리보드를 보고 오히려 긴장을 많이 했는데 박 감독과 다른 배우들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편안하게 잘 촬영할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스토커'는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스코필드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배우 웬트워스 밀러가 시나리오를 맡아 화제를 모았다. 박 감독은 "열이면 열, 어느 감독이 다루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영화가 나올 것 같은 각본이었다"고 '스토커'의 시나리오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여백이 많아 붓을 댈 곳이 넓은 각본이었다"며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대면서 빼기도 하고 고치기도 했다. 어딜 특별히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오프닝과 클로징 장면 역시 새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성격과 인물 묘사 등은 웬트워스가 잡아놓은 것이 워낙 좋아서 유지했다"며 "원래 각본의 장점을 제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스토커'는 18살 생일, 아버지를 잃은 소녀 앞에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이 찾아오고 소녀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이야기를 그린 스릴러 영화다. 미아 바시코브스카·니콜 키드먼·매튜 구드 등이 출연한다.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이자 제작자인 리들리 스콧과 故 토니 스콧 형제가 제작했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의 정정훈 촬영감독이 다시 한 번 박찬욱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영화는 지난 1월20일(현지시간) 미국 선댄스영화제 프리미어를 통해 공개된 데 이어 지난 19일 언론 배급 시사로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영화를 본 국내외 평단과 언론은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외신 버라이어티지는 "히치콕 감독의 놀랍고 기이한 스릴러와 동화적 요소, 현대적인 감각의 뒤틀림을 박찬욱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냈다"는 평을, 할리우드리포터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기교있는 스릴러물"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가디언 역시 "고딕풍의 동화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가족 미스터리다. 영화의 분위기는 질식시킬 듯한 힘이 있다. 문학적인 해석과 상징들이 풍부해서 다양한 해석의 재미가 있다"고 호평했다. '스토커'는 오는 28일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한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박영태기자 ds3fan@joy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