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기자] '만년 2위팀', '포스트시즌 단골손님이지만 정작 우승은 못하는 구단.' '강하지만 최강이라기엔 뭔가 부족한 선수단.' 지난 10여년간 두산 베어스를 수식하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지난 가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이런 말은 나오지 않을 전망이다. 무려 14년만에, 그것도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휩쓸며 정상에 오르며 믿기지 않는 드라마를 썼다. 2015년 프로야구 최강의 위치에 오른 두산의 숨은 힘을 살펴봤다.
◆프런트 강화, 바닥부터 다지기
"두산 윗분들은 참 대단하세요. 아마추어 선수들에 대해 줄줄이 꿰고 계시다니까요. 우리가 깜짝 놀랄 정도예요" 한 수도권 구단 스카우트가 털어놓은 얘기다. 그는 두산 프런트의 주도면밀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두산이 꾸준히 강호로 군림하게 된 계기를 하나만 꼽으면 '앞을 내다보는 준비'로 들 수 있다. 현재보다는 미래를 바라보고 토양을 다지는 작업, 그렇게 10여년간 밑바닥을 공고히 한 결과가 '화수분'이라는 단어로 나왔다.
지난 2004년 단장직에 오른 뒤 2011년 프로야구 프런트로선 이례적으로 대표이사 명함을 받아든 김승영 사장과 선수 출신으로 임원까지 승진한 김태룡 단장은 미래 로드맵부터 세웠다. 지금 당장의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향후 10년 뒤를 바라보고 대비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좋은 선수부터 발굴해야 했다. 스카우트 파트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고, 유망주 영입경쟁에서 타 구단들에 앞서기 시작했다. 애써 확보한 원석을 정밀하게 다듬는 과정도 중요했다. 2군 코치진 역량 강화에 힘을 쏟았고, 훈련시설 개선에도 과감히 투자했다.
지난 2005년 이천의 베어스필드를 개축해 야구 환경을 크게 개선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박정원 구단주의 지시로 베이스필드 부지를 완전히 뜯어고쳐 최신식 시설의 베어스파크로 새롭게 개장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유망주가 잠실로 배출되는 성과를 거뒀다. 한 두산 관계자는 "지금도 이천 상황에 대해 1군 프런트에선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 선수들의 훈련상황, 몸상태, 사생활 고민 등에 대한 종합 보고를 수시로 받고 있다"며 "사실 우리 구단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선 잠실이 아닌 이천으로 가는 게 더 빠르다" 했다.
◆핵심은 경쟁, 안주하면 도태된다
프로야구는 끝없는 긴장의 연속이다. 선수들은 패배에 대한 두려움, 다음 시즌 연봉이 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코칭스태프는 '언제 해고 통보를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프런트 직원들은 '승진 대상에서 누락될 수도 있다, 내년에는 임원 재계약이 불발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산다. 긴장과 긴장이 모여 긍정적인 힘으로 연결될 때 강팀이 만들어진다. 스트레스가 쌓이다 이상하게 폭발하면 팀이 망가진다. 자잘한 사고도 있었지만 두산은 대체로 결과가 좋았던 편이다.
여러가지 단어로 포장되지만 두산 성공의 원천은 사실 '선수단 경쟁'이라는 단어로 집약이 가능하다. 한동안 잘 했다고 마음을 놓았다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스타급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어느 순간 자기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 반대로 길게는 10여년간 2군을 전전하다 단숨에 주전으로 발돋움하는 선수도 목격됐다. 신고선수로 출발해 메이저리거까지 변신한 김현수는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로 꼽힌다. 두산의 라인업은 1∼2년이 다르게 바뀐다. 한국시리즈 우승 직전에서 분루를 삼킨 지난 2013년 주전 라인업 9명 가운데 빠진 선수가 2015년 현재 절반 가까운 4명(이종욱·손시헌<이상 NC>·최준석<롯데>·이원석<상무>)이다.
그러나 2년만에 두산은 공백을 느낄 틈도 없이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정수빈·김재호·박건우·허경민이 이들의 자리를 무리없이 채웠다. 1985년생인 김재호를 제외한 3명 모두 20대 한창 나이다. 한때 '두산 선수들로 두 팀을 만들어 리그에 참가해도 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예전보다는 선수층이 얇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웬만한 포지션에선 복수의 선수가 주전경쟁을 펼치고 있다. 치열한 포지션 경쟁과 적절한 세대교체가 아니었다면 두산의 구단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프런트·현장, 철저한 역할분담
부임 첫해 한국시리즈 우승의 영예를 누린 김태형 감독을 비롯해 최근 몇년간 두산 감독직을 거친 지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그건 프런트에 물어보라"는 것이다. 주로 신인 드래프트 전후 및 스토브리그를 앞두고 나오는 답변이다. 유망주 영입 및 선수단 구성여부는 프런트의 권한이라는 얘기다. 대신 현장의 일은 철저하게 덕아웃에 전권이 주어진다. 선수 기용, 라인업 구성, 경기 전략은 오로지 현장 사령탑의 몫이다. 프런트가 여기에 관여하는 법은 없다. 서로의 영역에 터치하지 않되 신뢰를 가지고 상대를 존중해준다.
코칭스태프 내부, 프런트 직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적인 영역에선 철저히 존중하고 대우하지만 사석에선 허물없는 '형·동생'이 되기도 한다. 특히 프런트 직원들의 경우 10년 이상 같은 멤버들이 자리를 지켜왔다. 가족과 같은 끈끈한 관계를 바탕으로 프로야구 10개 구단 가운데 가장 오랜 경력의 베테랑들로 구성됐다. 구단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두산 야구의 힘의 원천으로 인적변동 없는 프런트를 꼽기도 한다. 워낙 오랫동안 관련 업무를 다루다보니 인원 변동 잦은 타 구단들에서 볼 수 있는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 관계자는 "조금 과장하면 눈빛만 보고서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느낌이 들 정도"라고 했다. 20년 근속상을 받은 직원들이 있을 정도이니 선수단과 프런트의 소통 또한 꽤 원할한 편이다. 한 중견선수는 "몇몇 구단들처럼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는 구단은 아니다. 하지만 선수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가능한 선에선 들어주려고 한다. 무엇보다 프런트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부 구성원들의 끈끈한 유대관계, 두산의 또 다른 힘이다.
조이뉴스24 김형태기자 tam@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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