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지난 2014년 개봉작인 영화 '끝까지 간다'는 김성훈 감독의 절치부심이 녹아있는 작품이었다. 데뷔작의 흥행 실패 이후 겪은 오랜 공백, 그 덕분에 유치원생이던 딸 아이의 눈에 줄곧 '자고 있는 사람'이었던 그는 '끝까지 간다'를 통해 7년 만에 완벽한 재기에 성공했다. 영화는 약 3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이룬 것은 물론, 평단의 극찬까지 얻어내며 영화 부문 시상식의 단골 수상작으로 이름을 올렸다.
2년이 흘렀다. 김 감독은 세 번째 영화 '터널'(감독 김성훈, 제작 어나더썬데이, 하이스토리, 비에이 엔터테인먼트)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개봉 3주 차인 현재 524만여 명의 누적 관객을 기록 중이니, 전작 최종 관객수의 1.5배를 넘어선 숫자의 관객들이 이미 '터널'을 관람한 셈이다.
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무너진 터널 안에 고립된 한 남자 정수(하정우 분)와 그의 구조를 둘러싸고 변해가는 터널 밖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는 신랄한 사회 비판적 시각은 물론 김 감독 특유의 독특한 코미디 감각이 녹아있다. 무겁고 어둡게만 보이는 줄거리지만 극 초반 정수의 터널 적응기가 힘을 불어넣으며 전형적 재난 드라마와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하는 중이다. 감독은 '터널'로 또 한 번 장르 변주에 특출난 재능을 지닌 감독임을 입증했다.
영화의 개봉을 맞아 조이뉴스24와 만난 김성훈 감독은 '끝까지 간다'에 이어 재난물 '터널'에서도 독특한 긴장감을 연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알렸다. "전체적 이야기 속에서도 이야기의 긴장과 이완의 변주가 중요하다"는 김 감독에게선 영화에 대한 빛나는 열정과 뚝심이 읽혔다.
"이야기의 텐션을 만드는 일은 영화를 만들며 가장 하고 싶은 일인 것 같아요. 영화 한 편이 상영되는 시간 동안 어떤 텐션이 만들어지는지는 결국 큰 이야기와 드라마에서 비롯되지만, 전체를 보기 위해 각 부분 기승전결로 뭔가 '줬다, 놨다' 하는 텐션이 필요한 거죠. 물론 이런 작업을 수학 문제 계산하듯 할 수는 없고, 그런 재주도 없지만 그런 일에서 재미를 느껴요. 전체적 이야기가 가장 큰 힘이지만 그런 변주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죠."
딸의 생일을 맞아 케이크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던 정수는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가장이다. 자동차 영업 사원이라는 직업 설정은 정수의 능청스럽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뒷받침하고, 이는 극한의 재난 상황에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생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는 캐릭터의 논리를 완성한다.
주유소 직원의 실수로 기름이 가득 찬 자동차 안, 정수는 붕괴된 터널 속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대한의 조치를 취한다. 주유 후 받아 뒀던 생수에 눈금을 새기고, 트렁크 속 축구 동호회 유니폼을 입어 체온을 유지한다.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케이크부터 개 사료까지 먹을 거리도 눈여겨 봐 둔다. 정수의 낙관은 종종 지나치게 영화적이지만, 재난 상황과 코미디라는 상이한 정서를 하나의 맥락으로 엮는 흥미로운 기능을 한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김성훈 감독은 명쾌한 답을 내놨다. "정신차리고 살아야 할 세상 아닐까. 이 영화에서처럼, 뭔가를 버티는 최고의 힘은 웃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버티게 만드는 것, 그 안의 인물을 버티게 만드는 것이 유머라고 생각해요. 극 중 인물이 계속 '나 죽어'라고 생각한다면, 그도 우리도 힘들지 않을까요? 사실 이 영화를 메시지를 얻기 위해 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미 메시지는 수많은 것들을 통해 다 나와있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이 영화가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경우든 방식의 차이가 있더라도 재미를 느끼는 와중에 주제의식은 은연중에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상업 영화이니까요. 조각물을 보면 그 안의 뼈대는 보이지 않고 살만 보이잖아요. 하지만 조각을 보며 뼈대를 유추할 수 있죠. 우리 영화 역시 그런 미덕을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두 편의 영화를 연이어 흥행시킨 김성훈 감독은 어느덧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만드는 충무로의 실력파 감독으로 자리매김 했다. 여전히 "영화를 하는 게 너무 재밌고 행복하다"는 그는 "무대에서 처음 상을 받았을 때처럼 끝까지 설레고 싶다"고 말한다.
"다음, 그리고 그 다음이 무뎌지진 않을까 걱정도 돼요. 60살이 돼서까지 설레고 싶거든요. 사실 여전히 배우와 미팅을 하는 것조차 낯설어요.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나고 있네?' 하는 마음인거죠. 이런 상황이 아직까지 완전히 체감되진 않아요. 감독이니 배우를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아직도 신기한 마음이 들죠."
이하 김성훈 감독과 일문일답
-정수 역의 하정우는 물론, 그의 아내 세현 역 배두나의 연기에도 극찬이 쏟아졌다.
"하정우와는 오가며 인사를 나눴던 사이고, '허삼관'을 제작했던 프로듀서가 우리 제작자였던지라 현장에서 본 적이 있다. 우연히 하와이에서 두 번 마주쳤는데, 입국장과 와이키키거리에서였다. '아는 사람이다'라며 신기했는데, 그 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웃음)
쉬운 배역은 없겠지만 하정우는 누가 봐도 어려워보이는 역이었다. 그런데 배두나의 경우 그 어려운 지점이 가끔씩 나온다. 감정 곡선을 쭉 연결하는게 아니라서 툭툭 튀어보일 수도 있었는데, 적정 수위로 남은 자의 아픔을 잘 그려내줬다고 생각한다. 때로 아픔을 억누르고, 때로 밝은 척을 하고, 때로 슬픔이 삐져나오는 감정이다. 연출자 입장에서 고마운 배우다.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준 배우를 보며 내가 운이 좋은 연출자라고 느꼈다."
-'천만 요정'이라고도 불리는 배우 오달수 캐스팅의 경우 비슷한 이미지로 배우를 소비한다는 부담도 있었을 법하다.
"전혀 없었다. 보기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매번 비슷해보이나 매번 다른,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재밌는 다른 배우가 없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구조대장은 어느 재난영화에도 100% 있는 인물 아닌가. 그래서 식상하기 쉬운 역할이었는데 그걸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괴짜로 만들 순 없었다. 너무 불굴의 모습으로 그리자니 교본적이고 재미가 없을 것 같더라. 의외의 강단이 있으면 좋겠고, 안 그럴 것 같은데 의외의 막말을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행동이 엉뚱해보이고 템포에 유머가 있고, 그런 매력적인 인물을 원했다. 매끈한 인물보다는 그런 인물이길 바랐는데 그걸 오달수가 완성시켜줬다. 연기도 인품도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 분이 했던 영화들에 천만 관객이 들어서가 아니라, 정말 요정 같은 분이다. 피곤한 와중에도 그 공간을 밝혀주고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런 매력은 화면에서 느껴진다. 그 매력은 질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산이 아니라 사람에서 나오는 웃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에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봐도 매력 있다. 어떤 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웃음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다."
-배우 정석용, 최귀화, 예수정 등은 '부산행'에서도 등장했는데 나란히 '터널'로도 관객을 만나고 있다.
"촬영 때 그 분들이 '부산행'에 출연한다는 것을 듣고는, 잊고 있었다. 꼭 우리 배우가 나와서 봐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도 올해 꼭 보고 싶은 영화가 '부산행'이었다. 너무 만족스럽게 봤다. 아이 아빠라 그런지 수안(김수안 분)이가 나올 때마다 눈물이 펑펑 나더라. 안 울려고 했지만 혼자 다섯 번은 운 것 같다.(웃음)"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인물임에도, 미나(남지현 분)에게 망설이다 결국 물을 양보하는 정수의 모습은 예상 이상으로 이타적이었다.
"정수가 '약은'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물을 달라고 할 때 고민이 될 것 같더라. 고민은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시작됐다. '물 주세요'할 때 '예' 하면 너무 가짜 같지 않나. '여자가 예뻐서 주는거야?' 혹은 '너무 착해보이잖아'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없는데요' 하면 공감은 가지만 너무 못돼보이지 않나. 적절한 수위가 필요했고, 그 장면에서 관객을 동참시키고 싶었다. 정수가 머뭇대다 물을 주는 상황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선함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러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 만들어졌다. 물론 곧 나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작은 배역이지만 남지현의 연기 역시 인상적이었다.
"너무 잘했다. 어리고 귀여운 이 친구를 시커멓게 분장하게 했으니 미안하긴 했다.(웃음) 그러다보니 선한 눈이 더 도드라지더라. '진상'이나 '민폐' 캐릭터는 없길 바랐다. 물을 달라는 요청도 사실적이지 않나. 안타까움을 주는 존재인 동시에 귀엽기도 한 인물을 생각했다."
-영화의 미디어데이 때 하정우가 감독의 딸이 직접 그린 '터널' 포스터를 보여줬다. 아빠의 작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엿보였는데.
"현관문 밖에 그걸 붙여놨기에 뜯어서 안에 붙였다. 그랬더니 또 밖에 붙이라고, 택배아저씨가 봐야 한다고 하더라.(웃음) 지금 두 아이는 아홉 살, 여섯 살이다. 첫째가 유치원에 다닐 때 '아빠는 뭐 하고 있을까'를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더라. 다들 아빠가 무얼 하는지 이야기할 때, 내 딸은 '아빠는 자고 있어요'라고 했다고 한다. 반성했다. 아마 선새님도 '아, 백수구나' 싶어 더는 못 물어보셨을 것이다. '끝까지 간다'로 감독상 트로피를 받았을 땐 가져가서 자랑도 했다더라. 아이들이 아무래도 메달이나 트로피 같은 것을 좋아하나보다.(웃음)"
-'끝까지 간다'에서 많은 트로피를 안았다. 이번에도 기대하는 바가 있나?
"아이에게 '이번엔 없을거야'라고 했다.(웃음) 이미 평생 받을 것을 다 받은 것 같다.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그렇지만 같이 했던 배우들은 받으면 좋겠다. 상을 누리려 하기보단,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안 받아도 괜찮다. 트로피가 성적표는 아니니까."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이영훈기자 rok6658@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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