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김형태 기자] "말도 안되는 소리지. 매년 수백억씩 쏟아부어야 하는 '밑빠진 독'을 대기업 아니면 누가 운영할 수 있나." 너무도 당연한 듯 상식처럼 떠돌던 얘기다. 야구판에서 10년 이상 밥을 먹은 사람이라면 이 말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프로야구는 대기업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떠맡는 '자선사업' 또는 사회 공헌 사업'으로 여겨졌다. '10대 그룹 야구광 오너들의 놀이터'라는 말도 있었다. 지역별 연고가 뿌리내렸으며 국민들이 좋아하고 회장님들이 밀어주는 스포츠, 거의 매일 볼거리와 얘깃거리를 만들어내는 '국민 여가'. 2007년까지 프로야구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로부터 강산이 한 번 바뀐 현 시점, 이제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은 많이 사라졌다. 능력만 있다면 모기업의 지원을 등에 업지 않은 '자생 야구단'도 프로에서 경쟁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크게 확산됐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2008년 이장석 대표와 서울 히어로즈의 등장부터 시작됐다. 익히 알려졌듯이 그는 야구단을 원해서라기보다는 떠맡은 쪽에 가깝다. 2007년 시즌을 끝으로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면서 KBO는 백방으로 인수자를 물색했고, 그 과정에서 이장석이라는 미지의 인물이 등장했다.
◆악전고투의 연속
처음에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메인 스폰서로 어렵게 모신 우리담배가 채 1년도 되지 않아 발을 뺐다. 최소 수십억이 드는 선수단을 운영하기 위해선 뭐든 해야 했다. 큰기업·작은 기업 가리지 않았다. 동네 음식점들과도 협약을 마다하지 않았다. 서울 히어로즈라는, 이름은 그럴 듯하지만 '비빌 언덕' 없는 간판으로 2년을 어떻게 버텼다. 그 과정에서 주축 선수들의 트레이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운영비로 쓸 현금을 대가로 한 피눈물 나는 거래였다. '시집 가는 딸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마음' 이상이었을 것이다. 대기업 현대에서 풍족하게 지내던 직원들 중 히어로즈행을 선택한(선택받은) 이들은 살기 위해 허리띠를 바짝 조여맸다.
그러던 2010년 구세주가 나타났다. 국내 3대 타이어회사 중 하나인 넥센타이어가 메인스포서십을 맺기로 결정했다. 넥센 히어로즈의 탄생이었다. 다른 재벌 구단들 만큼은 아니지만 크게 한시름 놓으며 당분간 돈걱정 없이 시즌을 치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넥센은 파는 구단에서 사는 구단으로의 이미지 변신도 잠깐 시도했다. 2010년 돈 때문에 LG 트윈스로 떠내보냈던 이택근을 두 시즌 뒤 4년 50억원(구단 발표액)에 FA로 재영입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복귀한 김병현과 16억원에 계약하면서 역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이렇다할 간판스타가 없던 상황에서 김병현은 이름만으로도 화제와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당시 "넥센 선수 김병현입니다"라고 크게 자랑스러워하던 한 관계자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전략적 움직임
이 대표의 구단운영은 꽤 전략적이었다. FA를 앞두거나 연봉이 크게 상승할 것 같은 선수들은 정점에 올랐을 때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해외 진출을 희망하는 선수들에겐 구단이 나서서 에이전트를 주선해주며 이적을 앞장서서 추진했다. 그렇게 2015년 강정호가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2016년에는 박병호가 미네소타 트윈스로 떠났다. FA 자격을 얻지 못한 선수들을 흔쾌히 보내주면서 넥센은 선수들을 배려하는 구단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약 2천385만달러의 이적료도 챙겼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잡았다.
그 과정에서 가능성은 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하던 숨은 진주들을 중용했다. 서건창, 김민성, 김하성, 고종욱 등이 넥센 간판을 단 뒤 앞서거니 뒷서거니 스타로 발돋움했다. 지난해 신인 1차지명으로 영입한 이정후는 데뷔 1년만에 '이종범의 아들'이란 수식어를 떼버렸다. 마치 저비용 고효율 야구의 대명사인 미국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한국판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줬다. 모기업의 지원 없이 자생적으로 살아남은 구단이란 점에서 넥센과 이장석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수는 적지만 넥센은 나름 단단한 팬층을 소리없이 확보해갔다.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당시만 해도 가장 큰 부자구단이었던 삼성 라이온즈에게 6차전에서 분루를 삼킨 뒤 이 대표는 집중 주목을 받았다. 우승 구단 대표보다 더 많은 인터뷰를 소화하며 자신과 히어로즈 구단을 크게 알렸다. 그는 "처음 구단을 인수했을 때는 KBO 이사회에서 타 구단 사장들이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같이 밥먹으러 가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대한민국에 10개 구단 밖에 없는 이사회의 일원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며 뿌듯해했다.
◆추락의 시작
이장석은 성공의 신화로 부상했고, 넥센은 타구단들의 스터디 대상이 됐다. 모기업의 지원이 크게 줄어든 한 구단의 전직 대표는 직원들에게 "이제 우리는 부자 아니다. 넥센을 배워야 한다. 앞으로는 넥센처럼 해야 우리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신신당부한 적도 있다. 야구계 수장으로서, 한 명의 자수성가한 기업가로서 여러 청년들에게 '롤모델'로까지 추앙받은 이 대표와 히어로즈는 그러나 최근 몇년간 어두운 뉴스의 한 가운데 섰다. 히어로즈 창단 당시 주요 투자자 중 한 명이었던 재미교표 홍성은 회장과의 지분을 둘러싼 법정공방이 지루하게 전개됐고, 급기야 이 대표가 횡령 및 사기죄로 구속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메인 스폰서 넥센타이어는 이미지 실추를 이유로 한때 약속된 스폰서료 지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선수단도 도마 위에 올랐다. 최근에는 넥센 소속 선수 박동원과 조상우가 인천 원정 도중 호텔방에서 한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 NC 다이노스, KT 위즈와 실시한 두 차례 트레이드에서 발표와 달리 KBO가 금지하는 현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강윤구를 NC 김한별과 맞트레이드하면서 1억원, 윤석민을 KT 정대현-서의태와 트레이드하면서 따로 5억원을 받은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과정에서 거래금액의 0.5%인 300만원을 이 대표와 고형욱 단장이 인센티브 명목으로 챙겼다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젠 바뀌어야
KBO와 야구계 종사자, 그리고 팬들을 기만했다는 여론이 들끓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한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만큼 큰 아픔도 없다. 이 대표와 히어로즈는 신뢰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구단 창단 이후 최대 위기에 몰린 상태다. 지금 되돌아보면 위험신호는 감지되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넥센이 성공하더니 경영진이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라든가 "조직 내에서 그의 말이 곧 법이다. 한때 고생했던 주위 측근들을 다 쳐낸다"는 말이 알게 모르게 떠돌았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위험하다'고 한다. 이 대표와 히어로즈의 갑작스런 추락은 여러모로 아쉽기만 하다. 냉철하면서 치밀한 전략과 유기적인 대응으로 '자본의 힘'을 이겨낸 그다. 이룰 수 없을 것 같던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이렇게 몰락하는 건 야구계를 넘어 스포츠계 전체에서 큰 손실이다. 주위의 냉대를 무릅쓰고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넘보는 야구단을 만든 주인공이 하루 아침에 모든 이들의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 대표가 언제까지 야구단 오너로 남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야구밥을 계속 먹는한 크게 변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어렵게 일어난 '영웅들'이 이렇게 주저앉기엔 해놓은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조이뉴스24 김형태기자 tam@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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