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김형태 기자] #"발에도 슬럼프가 있어요." 살짝 웃으면서 불쑥 내뱉는 한마디에 깜짝 놀랐다. 전날 그의 도루능력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타격에는 슬럼프가 있지만 발에는 슬럼프가 없다"고 한 부분을 자신만의 이론으로 살짝 고쳐준 것이다. 13년 전인 2005년 여름 어느날이었다. 그해에 그는 베이스를 43개나 훔치며 거침없이 달렸다. 아직까지 개인 최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굳게 다문 입에 평소의 온화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자존심이 무너진 듯 잔뜩 굳은 표정으로 특타에만 집중했다. 함께 방망이를 쥔 팀선배 이병규는 "훈련에 방해되니까 밖으로 나가시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2006년 3월 초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끝난 직후였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서 일본, 미국에서 미국을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진출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일부 선수들은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지만 이렇다 할 기회를 잡지 못한채 벤치만 달군 선수들은 다소 소외된 느낌이었을 것이다. 시즌이 다가온 시점, 경기감각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박용택은 이를 악물고 스윙연습에 매진했다.
#갑자기 인상을 구기면서 고개를 숙였다. 눈물보가 터지자 좀처럼 참지 못했다. 스트라이프 정장에 턱시도와 반무테 안경으로 한껏 멋을 낸 그는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면서 뜨거운 눈물을 연신 흘렸다. 2013년 골든글러브 시상식 당시 페어플레이상을 수상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지난 2009년 타격왕 경쟁이 격화됐을 때 타율 관리를 위해 시즌 막판 경기 출장을 의도적으로 포기했다는 비난이 떠올랐던 듯하다. 언제나 시크하고 한편으로는 다소 차가워보이는 인상의 그가 실제로는 여린 가슴을 가진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면이었다.
#박용택(39)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선수다. 프로 17년차를 맞은 베테랑이지만 '노장'이라고 부르기엔 꽤 젊어 보인다. 거의 매 시즌 손꼽히는 활약을 펼쳤지만 해당 분야에서 '원톱'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올스타급 선수임에는 분명하지만 KBO리그 최고의 선수로 팀을 구성한다면 그가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쉽지 않다. 골든글러브 4회 수상에 빛나는 그는 아직 정규시즌 MVP를 수상한 경험이 없다.
#그의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한두해 최고의 활약을 펼친 뒤 소리소문 없이 하향곡선을 펼치는 선수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3할 타율 10회에 두 자리수 홈런 11차례를 기록했다. 20도루 이상도 7차례나 해봤다. 무엇보다 웬만한 구장에 비해 타격성적의 저하를 피할 수 없는 잠실을 17년간 홈구장으로 사용하면서 거둔 성적이다. '꾸준함'이라는 측면에서 그를 넘어설 현역 타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 박용택이 한국 최다안타왕으로 등극했다. '난공불락의 성'으로만 여겨졌던 양준혁의 2천318개를 지난 23일 잠실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넘어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난 해만 해도 박용택이 양준혁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워낙 조용히, 그리고 꾸준하게 안타를 추가한 까닭인지 요란하지 않게 '거목'을 넘어섰고, 티나지 않게 수상소감을 남긴 뒤 항상 그렇듯 다음 경기에 나섰다. 이렇다 할 자기 자랑 없이 언제나 주어진 역할에만 집중하는 그다웠다. 꾸준히 타격폼을 수정해온 그는 "타격은 정의내리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말을 남겼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대망의 3천안타를 한국에서도 볼 수 있을까. 26일까지 2천321안타를 친 박용택이 전인미답의 3천안타에 도달하려면 679개를 더 추가해야 한다. 지난 두 시즌 평균 안타수인 175개로 잡더라도 올해 포함 4시즌 동안 같은 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기록이다. 그렇지만 당분간 그의 기세가 꺾일 것 같지도 않다. 20년 가까운 프로 생활 동안 그는 이렇다 할 스캔들 한 번 없이 자기 관리에 충실했다. 그 흔한 음주사고에 연루된 적이 없었고, 프로야구판을 떠들석하게 했던 여러 추문과도 무관했다. 그는 집과 야구장이 인생의 전부로 보일만큼 마치 기계처럼 규칙적인 스케줄로 17년을 버텨왔다. 3년 더 같은 패턴을 유지하라는 게 무리한 주문은 아닐 것이다. 2021년 박용택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까.
조이뉴스24 김형태기자 tam@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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