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가 카타르 도하에 온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됐습니다. 다른 취재진과 달리 조금 늦게 도하에 입성했지만 아시안컵에서 한국의 8강 진출 기쁨을 함께하며 경쟁팀들의 동향도 주의 깊게 살피는 등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기자는 처음으로 도하시 전체를 돌아봤습니다. 매번 숙소에서 경기장과 메인미디어센터(MMC), 각 팀의 훈련장만 오가는 빡빡한 생활을 하다 잠시 여유가 생겨 시내를 비롯해 한참 새 건물이 들어서고 있는 신도심 등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2022 월드컵을 유치한 국가답게 여기저기서 공사가 진행중이었습니다. 현재 도하는 전체가 '거대한 공사판'이라고 하는 게 딱 맞을 것 같습니다.
한참 거리를 거닐다 쇼핑몰 벤치에서 잠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느끼려는 찰나, 한 외국인이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인근 대형 빌딩 신축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그는 기자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코리아'라고 하자 '사우스(남)'냐 '노스(북)'냐를 되묻더군요.
'사우스'라고 강조하자 허름한 복장의 이 노동자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돕니다. 무슨 일일까? 혹시 한국으로 취업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알려달라는 것일까 하며 궁금해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양손을 펼칩니다.
그러더니 '1996 식스 투(6-2)'를 외치며 손가락을 굽혔다 펴기를 반복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했지만 이내 알아챘습니다. 8강에 진출한 한국의 상대인 이란과 1996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대회 8강에서 만나 2-6으로 참패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였던 거죠.
그 노동자는 이란인이었습니다. 일거리가 많고 임금도 잘 나오는 도하에서 이주 노동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는 "이번에도 이란이 그 때처럼 크게 이겨줄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란~ 이란~ 짝!짝!"이라며 즉석에서 응원구호를 외치더군요.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냥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저 여유있게 '알았으니 그만 가시라'는 반응 외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일반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이런 장면은 국제대회 출장에서 이란 취재진을 통해 종종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꼭 아시안컵 6-2 승리의 과거 얘기를 꺼냅니다. 1-2로 전반을 마친 뒤 후반에만 5골을 넣으며 이겼으니 이란의 축구 역사에서는 대단한 경기였을 겁니다.
이란뿐 아니라 중동의 다른 나라들도 이 경기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19일 북한-이라크전 취재 도중 만난 사우디아라비아 '걸프 매거진'의 유슬라흐드 아흐메티 기자도 여덟 손가락을 펼치며 "식스 투는 중동 축구 역사 전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기"라고 회상했습니다.
한국과 이란 사이에는 많은 경기가 있었는데도 꼭 많은 골이 터졌던, 그들이 승리했던 기억만 꺼내니 씁쓸하기도 하고 지겹기도 했습니다. 바로 지난 2007 대회 8강전 승부차기 승리도 있고 2000년 이동국의 골로 이겼던 기억이 우리에게는 생생한데 말이죠.
박지성의 골로 이란의 남아공월드컵 본선 진출을 좌절시켰던 흐뭇한 두 경기도 있고,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 3~4위전에서 4-3 대역전극을 펼친 짜릿함도 아직 식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이번 8강전 만남에서 태극전사들이 지난 대패의 기억을 뇌리에서 잊게 하는 시원한 승리를 거둬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란과는 2005년 2-0 승리 이후 6경기 연속 무승(승부차기 승 포함)을 기록중이니 한 번 제대로 이길 때도 됐습니다.
한국 대표팀이 워낙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으니 괜찮은 결과를 낼 것으로 믿습니다. '아시아의 호랑이'다운 힘을 과시해 '식스 투'라는 말이 당분간 그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게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왕의 귀환'의 제대로 된 발걸음은 이제 시작입니다.
조이뉴스24 도하(카타르)=이성필기자 elephant1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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