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장내의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영화가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을 분절적으로 차용했다는 점은 이미 제작 단계부터 이슈가 돼 왔던 일. 그럼에도 지난 11월29일 영화 '변호인'의 언론 배급 시사 후 기자간담회에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이름이 '그 분'과 같은 대명사로 지칭됐다.
'변호인' 출연과 관련, 불이익 혹은 외압을 걱정하지는 않았냐는 질문까지 터져나오던 현장은 웃지 못할 사회상을 대변했다. 배우 오달수는 "누가 우리에게 불이익을 줄지, 그게 궁금하다"며 "그럴리 없다고 본다"고 답했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 뒤, 노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인물 송우석 역의 송강호는 조이뉴스24와 만나 당시를 떠올렸다.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을 누구도 말하지 않았었는지, 굳이 왜 그랬는지를요. 이 영화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변호인'이 그 분을 미화하는, 혹은 그 분의 삶에 헌정하는 영화로 인식되는 것을 경계하고 싶었던 거죠. 영화는 그 분 인생의 한 단면을 그리지만 그 삶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며 열심히 살았던 우리들의 모습을 보자는 이야기거든요. 현재의 우리를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영화죠. 이념적이거나 논쟁적인 이야기는 아니니 선입견을 갖지는 않았으면 해요. 어떤 반응이든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고요."
영화를 연출한 양우석 감독은 이 영화를 1990년대에 처음 기획했다. 전 대통령 노무현이 아닌, 인권 변호사 노무현의 활약을 떠올리며 영화를 구상한 셈이다. 그럼에도 우려는 있었다. 재임 중, 그리고 이후 그의 행보에 대해 우리 역사는 아직 완결된 평가를 내놓지 못했다.
조선시대 관상쟁이의 이야기를 그린 송강호의 전작 '관상'이나 SF 장르 '설국열차'와는 분명 다른 무게를 안겼을 만한 작품이었다. 이미 한 차례 '변호인' 출연을 거절한 적 있다고 밝혔던 송강호는 이 영화를 가리켜 "느닷없이 왔고, 눈에 밟히더라"고 돌이켰다.
"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니지만, 기획 단계에서 '언제쯤 그 시나리오가 내게 온다더라' 하고 언질이 있는 작품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 영화는 마음의 준비가 안됐을 때, 느닷없이 왔죠. 빠르게 출연 여부를 알려주기로 유명한 저지만, '변호인'은 그렇게 빨리 결정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이야기였죠. 너무 재밌고 좋았지만, 내가 하기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가볍게 거절했어요. 그런데 계속 머리에서 시나리오가 떠나지 않았어요. 눈에 밟힌다고 하나. 그렇게 1주일이 걸렸죠."
"어떤 사람일지라도 연기의 부족한 면은 보이기 마련"이라고 말을 이어 간 송강호는 "지난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친구이자 '변호인' 제작자인 위더스필름 최재원 대표를 만나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며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부족한 점이 보인다면 그건 내 능력 밖일 테고, 최소한 내 작은 진심이라도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모자라도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변호인'을 연출한 양우석 감독은 웹툰 '스틸레인'의 작가이자 CG 회사를 경영하기도 한 인물. 10여 년 간 충무로에 발을 담가 왔다. 연출로는 '변호인'이 데뷔작이지만 송강호는 양 감독에게서 베테랑 감독 못지 않은 기량을 봤다. 송강호는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며 "감독이 집요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이기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연기를 주문하곤 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불필요하게 촬영이 늘어지는 일이 없었어요. 좋은 연기가 나왔는데도 다른 걸 한번 더 요구하거나 본인 욕심을 계속 추구하는 경우가 없었고요. 그게 스태프들의 집중력을 높여 준 배경이 됐어요. 빨리 찍는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영화의 본질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감독이었죠. 오래 찍고 여러번 간다고 기막힌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엑기스가 나오는 순간을 안다는 거죠. 스태프들에게도 역시 이 영화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고, 좋은 영화를 만들어보려는 남다른 마음이 있었어요."
송강호의 호연과 스태프들의 진심, 양우석 감독의 영리한 연출은 영화 속 송우석의 성장과 자각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두 시간 내외라는 상업 영화의 통상적 러닝타임 안에서 그의 변모를 그리기까지, 제작진의 고심도 컸다.
"'두 시간이라는 영화의 러닝타임만 아니라면…' 싶은 아쉬움이 있었어요. 보다 풍성하게 그리고 싶었으니까요. 특히 앞부분에서 그랬는데, 그럼 영화가 두 시간 반이 되는거겠죠.(웃음) 그렇다고 공판 장면에서 끊을 수는 없으니 앞부분을 조금 더 줄이고 압축했어요. 시간적 제약만 없었다면 보다 심도 있고 풍성하게, 다채롭게 만들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어떤 영화든 다 그렇죠. 제약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다 들어가야 훌륭한 영화고요."
출연을 결정한 뒤에도 노 전 대통령,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알고있는 그의 과거를 연기하기까지 송강호의 고민은 적지 않았다. '변호인'의 모든 배우와 감독, 스태프들이 걱정하듯 영화의 색깔이 왜곡돼 전해질지 모른다는 걱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송강호는 "배우 송강호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떤 개인적인 견해나 감정을 지녔는지는 이 영화에서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닌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단지 1980년대를 관통한 이분의 치열한 삶의 열정과 태도는 30년이 지나도 제게나, 어떤 분들에게나 크게 다가온다고 봐요. 부림사건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는 작품을 하며 알게 됐죠. 제게도 1980년대는 대학과 군대, 연극, 등 제 삶의 키워드가 모두 담긴 시대예요. 나름대로 격동의 시대였죠. '변호인'을 글자 그대로 대중 영화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정치적 혹은 이념적으로 잣대를 들이대고 주장하는 영화는 절대 아니고요. 누구든 영화를 본다면 지향점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변호인'은 1980년대 초 부산을 배경으로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도 짧은 세무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다섯 번의 공판과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송강호 외에도 김영애·임시완·오달수·조민기·송영창 등이 출연한다. 오는 18일 전야 개봉으로 관객을 만난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박세완기자 park90900@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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