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필기자] "사장님이 오늘 근무를 빼줘서 올 수 있었어요."
능숙한 한국어로 기자에게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건넨 필리핀 출신의 아끼노 뻬르바뉴(32) 씨는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는 7년차 이주 노동자다. 늘 일에 피곤하지만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농구 응원 기회가 왔다. 2014 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8강 H조 본선리그에서 필리핀과 한국이 만난 것이다.
필리핀의 국기는 누가 뭐래도 농구다. 뻬르바뉴 씨는 아시안게임 시작 후 필리핀 경기를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미루고 미루다 동료들과 함께 27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농구 8강 리그 2차전을 관람했다.
뻬르바뉴 씨는 "한국인 동료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인 동료들과 단체표를 예매했다. 필리핀 농구를 보기 위해서라면 2만원은 큰 돈이 아니다. 버스를 대절해서 온 동료들도 있다"라고 전했다.
이날 뻬르바뉴 씨처럼 체육관을 찾아온 필리핀인들은 어림잡아 1천명은 거뜬하게 넘었다. 검색이 강화되다보니 1쿼터가 지나서야 관중석이 메워졌지만 응원에는 지장이 없었다.
삼산체육관 좌석은 7천200여석이고 반 이상은 국내 관중이 메웠다. 하지만, 필리핀 팬들은 관중석 곳곳에 분산해서 앉아 우렁찬 응원 목소리로 체육관을 뒤흔들었다. 단체 티셔츠를 맞춰입고 오거나 막대 풍선에 응원 피켓을 들고 오는 등 준비도 철저했다.
이들은 '태극전사'처럼 필리핀 국가대표의 애칭인 '길라스(Gilas)'를 광적으로 외쳤다. 길라스는 필리핀어로 '용맹하다'라는 뜻이다. 한국을 상대로 필리핀 전사처럼 나서라는 응원이자 압박이었다.
당연히 한국 팬들의 '대~한민국' 구호는 필리핀 팬들의 응원 함성에 제대로 묻혔다. 필리핀이 슛을 성공시키면 광적인 함성이 체육관을 뒤덮었다. 관중석을 발로, 손으로 두드리며 굉음을 내뿜었고 파도타기 응원도 주도했다.
얌전한 한국 관중 입장에서는 경쟁심을 느낄 만했다. 한국이 공격을 하면 야유는 기본이었다. 한국이 원정 경기를 하는 느낌일 정도였다. 마치 지난해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4강전을 다시 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필리핀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이겨내지 못하고 79-86으로 패하며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필리핀을 잡아야 1위로 4강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었다. G조 1위가 이란이 될 가능성이 있어 2위 중국을 상대하는 것이 한국으로서는 그나마 수월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국대표팀은 국제경기대회 경험 미숙을 고스란히 노출하면서 4쿼터 역전을 하기 전까지 내내 끌려갔다. 다행스럽게도 끈기를 발휘한 한국이 97-95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막판 외곽포와 몸을 던진 수비가 아니었다면 한국이 그대로 패배할 수도 있었던 힘든 경기였다.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대회를 대비하기 위해 한국대표팀이 지난 7월 말 뉴질랜드와 홈에서 A매치를 치른 것이 2006년 월드바스켓볼챌린지 이후 8년 만에 국내에서 치른 A매치였다. 그 정도로 한국 농구는 국제 농구의 흐름에 비켜나 있었다. 필리핀 팬들이 국내에서 보여준 광적인 응원 열기에 대한농구협회는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해지는 한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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