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기자] 2014년 한 해 동안 수십 편의 드라마가 쏟아졌다. 깊은 감동을 안긴 드라마도 있고, 설렘과 두근거림을 선물한 드라마도 있으며, 존재감 없이 사라진 드라마도 있다.
드라마 속 캐릭터는 재미를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착하고 예쁘고 씩씩하기까지 한 여주인공, 혹은 모든 것이 완벽한 남자주인공이 무조건적으로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는 시대는 지나갔다. 뻔하고 진부한 캐릭터보다 개성 넘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사랑받는 시대다.
2014년 안방극장의 캐릭터들이 유독 그랬다.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이건만,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모은 캐릭터가 있었다. 오만방자하고 도도함이 넘치지만 얄밉지 않은 여주인공도, 결핍이 가득해서 오히려 감싸주고픈 남자주인공도 있었다. 너무 현실감이 넘쳐서 애잔하고 또 공감을 얻은 캐릭터들도 있다. 물론 그 캐릭터를 제 옷처럼 소화하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애정, 열정이 수반됐기에 가능했다.
올 한 해 시청자들이 사랑했던 드라마 속 캐릭터를 정리했다.
◆'별에서 온 그대' 도민준-천송이
'별그대'는 400여 년간 조선 땅에 살아온 외계인 도민준(김수현 분)과 한류여신 톱스타 천송이(전지현 분)의 로맨스를 그려 30%에 육박하는 높은 시청률을 얻은 작품. 기발한 스토리만큼 드라마 속 캐릭터들도 범상치 않았다.
김수현이 연기한 도민준은 400년 동안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외로운 이방인. 그동안 수많은 영화에서 그린 외계인들과 달리 '별그대'의 도민준은 사랑에 빠질 수 없는 외계남이었다. "도민준 도와줘"라는 천송이의 요청에 단숨에 절벽까지 날아왔다 투덜대며 사라지는 '츤데레', 이별을 앞두고 소리 없이 오열하는 '순정남', 잠든 천송이의 이마에 살며시 키스를 하는 '로맨틱남'이었다. 이 매력적인 외계남 도민준에 대한민국 여심은 흔들렸다.
전지현이 맡은 한류여신 천송이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여인이었다. 다소 부족한 지적 능력에 오만하고 시건방진 스타였지만, 그럼에도 사랑스러웠고 예뻤다. 매회 애타게 "도매니저~" "도민준씨~"를 찾았고 "쏴리" 등 착착 달라붙는 유행어를 탄생시켰다. 팬더눈으로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르고 "천송이가 랩을 한다 송송송"을 소화해내는 모습은 시청자들을 미소 짓게 했고 "15초 동안 꼬시려고 했는데, 내가 넘어갔다. 나 여자로 어떠냐?"고 직설적으로 사랑 고백하는 모습은 여자들조차도 설레게 했다.
천송이를 오랫동안 짝사랑한 키다리아저씨 이휘경(박해진 분)도, 살인마로 돌변하며 공포를 느끼게 하는 소시오패스 이재경(신성록 분)도, '별그대'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캐릭터였다.
◆'밀회' 오혜원-이선재
JTBC '밀회'는 20살 나이 차를 뛰어넘는 격정 멜로로 설렘을 선사했다. 완벽한 커리어우먼이자 유부녀인 40세 여성 오혜원과 20세의 가난한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 두 남녀의 얽히고 설킨 사건과 나이를 뛰어넘은 사랑은 김희애와 유아인의 열연을 통해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오혜원은 누가 봐도 반듯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순수한 청년 선재를 만난 혜원은 한참을 잊고 지냈던 사랑에 새로이 눈을 떴다. 설렘도, 질투도, 성적 욕망도 아낌없이 드러냈고, 결국에는 사랑으로 인해 권력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체념한 얼굴이 시청자들을 아프게 했다.
유아인이 연기한 유선재는 또 어떤가. 절정의 순수함과 천재적 재능을 오간 선재는 시청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충동적이었던 키스를 잊으려 하는 오혜원에게 "원래 남의 여자 관심 없는데"라고 일갈하는 장면, 절망 가득한 얼굴로 "어차피 다 지옥이니까"라며 읊조리고, "제가 돌아버리잖아요"라며 혜원에게 키스를 퍼붓는 장면, '피아노맨'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혜원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얼굴 등은 오래도록 시청자들의 가슴에 남았다.
오혜원과 유선재는 인상 깊었던 캐릭터였던 만큼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특히 혜원이 어린 제자의 볼을 꼬집으며 "이건 특급 칭찬이야"라면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모습은 이후에 수없이 회자됐다. '무한도전'에 출연한 김영철도, '개그콘서트'의 김지민도 김희애 따라잡기에 나섰다.
◆'괜찮아 사랑이야' 장재열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 이어 다시 한 번 노희경·김규태 콤비와 손잡은 조인성은 장재열이라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장재열은 겉으로는 능글맞은 라디오 DJ이자 인기 추리소설 작가, 그러나 노란색에 집착하는 강박증이 있고, 침대에서는 자지도 못한다. 의붓아버지를 죽였다는 죄로 교도소에 수감된 형이 있고, 자신만을 의지하는 여린 어머니가 있다. 게다가 자신과 비슷하게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남자와 쉽게 스킨십을 나눌 수 없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이 복잡다단한 장재열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해 낸 건 조인성의 힘이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도로를 질주하는 장재열을 감싸안고 싶었고 함께 울어주고 싶었다. 연인에 대한 달콤한 사랑 고백, 진심이 담긴 프러포즈, 내면의 아픔이 담긴 로맨스는 시청자들을 설레게도 했다가 아프게도 했다.
◆'왔다 장보리' 연민정 문지상
올 안방극장 가장 뜨거운 화제작이었던 '왔다 장보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캐릭터들. 씩씩했던 장보리부터 악녀 연민정, '호구와트' 오창석, '갓지상' 문지상 등 등장인물들이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했다.
이유리가 연기한 연민정은 '왔다 장보리'의 최고 인기 캐릭터. 거침없는 악행과 상상초월의 패륜을 저지르는 인물. 자신의 부모도, 동거했던 연인도, 자신이 낳은 아이마저 버렸고 재벌가 며느리가 되려고 기를 썼다. 장보리에 대한 악행은 하나 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고, 거짓말과 변명으로 일관했다. 연민정의 악행이 하나씩 들킬 때마다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동시에 가련한 동정심이 들기도 하는 묘한 캐릭터였다.
이유리의 살벌한 표정과 톡톡 튀는 대사들은 인터넷에서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했으며, 올해 MBC 연기대상의 강력한 후보로 손꼽히고 있다.
성혁이 연기한 문지상도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연민정의 옛남자 문지상은 장보리의 복수가 지지부진한 사이, 최강 악녀 이유리를 향한 살벌한 복수전으로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장보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도왔고, 친딸 비단이를 위한 절절한 부성애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문지상이 드라마 전개에 결정적 키를 쥐고 있었기에 그의 행보도 더 주목받았다. 문지상은 안방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갓지상', '국민 탄산남', '문사이다' 등의 애칭으로 불리며 크게 사랑 받았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 이건-김미영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막장 드라마가 넘쳐나고, 뻔한 로코물이 넘쳐나는 안방극장에 오랜만에 찾아온 공감 로맨스였다. 억지스러운 인물도, 식상한 요소도 없었다. 보는 내내 웃음과 따뜻한 감동을 유발하며 시청자들을 웃고 울렸다.
거칠어 보여도 알고 보면 속이 따뜻했던 남자 건과 평범하지만 누구보다 순수한 미영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캐릭터였다.
장혁이 연기한 이건은 여타 드라마의 '로코남'들과 달랐다. 이건의 대명사가 된 음흉한 웃음소리 '음하하하', 달팽이를 향한 욕정에 몸부림치는 '음란건', 다크서클로 뒤덮힌 얼굴, 단발의 느끼한 머리까지. 독특한 설정이 흥미로웠다. 때론 허당의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미영과의 이별이나 개똥이를 생각하는 슬픔 등 처절한 아픔도 갖고 있는 인물. 따뜻한 이건에 시청자들은 매료됐다.
장나라가 연기한 김미영은 한없이 착하고 여리지만 누구보다 강한 여자였다. 민폐녀가 아닌 감싸주고 싶은 천상여자의 모습으로, 또 드라마 막판에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픔을 감싸주는 강한 여자의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미생' 장그래와 오과장, 수많은 대리들
tvN 금토드라마 '미생'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그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신드롬 속에서 매회 자체최고시청률을 경신하고 있으며, 시즌2에 대한 요구도 빗발치고 있다.
'미생'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현실감 넘치고, 펄떡펄떡 살아움직인다. 장그래(임시완 분)와 오상식 과장(이성민 분), 안영이(강소라 분), 장백기(강하늘 분), 한석율(변요한 분), 그리고 김대리(김대명 분), 강대리(오민석 분), 하대리(전석호 분), 성대리(태인호 분) 등 그 어느 하나 허투루 된 캐릭터 없이 이 시대 수많은 미생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임시완이 연기한 스펙 전무의 고졸 검정고시 장그래는 마음 깊숙이 응원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럴싸한 스펙도, 자격증도 없고, 외국어 앞에서는 움츠러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둑을 통해 얻게 된 남다른 통찰력이 있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내려 노력한다. 직장 상사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도 일을 배우려는 자세도 기특하다. 미숙했지만 성장해가는 장그래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자신을 투영하고 깊이 공감하고 있다.
인턴에서 신입사원이 된 이들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스펙을 지니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강하늘, 잘나고 당당한 안영이가 그들이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실상은 고민도, 걱정도 많은 직장인일 뿐이다. 여기에 눈치 백단에 때로는 능글맞아 보이지만 상대방의 속내까지 간파하는 한석율은 '미생'의 또다른 활력소다.
장그래의 따뜻한 멘토이면서 승부사적 워커홀릭 기질의 오상식 과장과 특유의 우직함과 의리 넘치는 김대리, 육아에 고민하는 워킹맘 신차장, 그리고 수많은 대리들까지. 그야말로 '미생'은 공감 넘치는 캐릭터들의 보고다.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쳐 나가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직장인의 비애도, 카타르시스도 느낀다. 주인공, 조연 할 것 없이 모두 응원하고 싶어지는 캐릭터들이다.
조이뉴스24 이미영기자 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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