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솔직히 말하자면, 뜰 줄은 알았다. 부지런히 이어갔던 단편 작업에서도, 지난 2014년 선보였던 독립 장편 영화 '들개'를 통해서도, 배우 변요한이 지닌 가능성을 점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반듯한 이목구비에선 때로 티없는 선량함이, 때로 종잡을 수 없는 광기가 읽혔다. 그리 멀지 않은 시일 내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더 많은 감독이 그와 작업하길 원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변요한의 잠재력이 터져나올 작품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일 줄은, 그것도 tvN '미생'(극본 정윤정/연출 김원석)의 '개벽이' 한석율을 통해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첫 드라마인데다 영화를 통해 선보였던 것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이미지의 인물. 과연 영리한 선택일지 조금 우려도 됐다. 지난 2014년 10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를 만나기 전만 해도 그랬다.
영화제 기간 중 초청작 '소셜포비아'(감독 홍석재)로 조이뉴스24와 만났던 변요한은 앞서 영화 '들개' 인터뷰 차 만났던 때와는 꽤나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조용 조용한 말씨와 차분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살랑살랑 치는 눈웃음부터 엉뚱한 유머까지, 놀랍도록 새로운 캐릭터가 돼 있었다. 방영은 아직이었지만 '미생' 촬영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드라마가 첫 선을 보였다. 주인공인 장그래(임시완 분)와 더불어 한석율도 서사의 중심에 선 에피소드였다. 부산에서 본 변요한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한석율 예고편'이었다. 매회 이어진 호평과 인기를 통해, 변요한은 당시 보여준 자신감이 결코 자만이 아니었음을 입증해냈다.
'미생' 이후 그는 작품과 광고, 화보 등 쏟아지는 러브콜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뜰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빨리 그 실력을 더 많은 대중에게 인정받을 줄은 몰랐다. 기본기 탄탄한 신예가 드디어 날개를 펼쳤으니 반갑고 또 반가운 일이다. 변요한은 "감독님과 작가님에게 너무 감사하다"며 "웹툰 속 한석율보다 드라마 속 한석율의 포지션이 새롭게 창조되면서 인물이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드라마의 한석율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웹툰은 많이 읽지 않았어요. 이미지와 성향만 파악해 빼낼 것만 빼냈죠. 제 능력에선 원작 속 한석율의 5%만 표현해내도 인물을 조금은 이해했다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작가님이 한석율 역을 너무나 크게 만들어주셨어요. 웹툰 속 한석율은 멋지지만 우스워보이는 면이 있었어요. 드라마 속 한석율은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죠. 저 변요한보다 한석율이 훨씬 멋있는 사람이라는 걸 늘 생각했어요. 배려심도 강하고, '독고다이' 정신도 있죠, 추진력도 강하고, 섹시하기도 하고요.(웃음)"
능청스럽고 오지랖 넓고 정도 많은 한석율은 '미생'의 어느 인물과도 남다른 '케미스트리'를 자랑한 캐릭터였다. 장그래와도, 안영이와도, 심지어 장백기와도 찰떡같은 호흡이 돋보였다. 특히 라이벌에서 둘도 없는 동기가 된 장그래와 한석율의 우정은 '브로맨스' 코드로도 읽히며 유독 큰 관심을 모았다. 변요한은 "석율과 그래는 서로 적이었고 라이벌이었지만 상대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서로를 제일 먼저 찾는 친구가 됐다"고 설명했다.
"서로 틱틱대며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을 대중들은 귀엽게 보신 것 같아요. 어떤 네티즌 분은 석율과 영이가 어울린다고도 하시던데.(웃음) 둘이 일탈을 하는 에피소드 때문인가봐요. 하지만 한석율은 안영이를 완전히 동기로 바라봐요. 장그래, 장백기에게는 묘한 연민 같은 것이 있지만 석율과 영이는 서로를 동기로만 대하기 때문에 오히려 둘이 붙어있을 때 아슬아슬함을 느끼신 분들이 있나봐요. '미생'을 재밌게 보신 분들은 인물들 간 관계 역시 재밌게 읽어주셨더라고요."
'미생'이 가히 신드롬급 인기를 얻었던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 변요한이 새로이 얻게 된 팬들 역시 상당하다. '대체 어디서 이런 배우가 나타났냐'는 반응이 쉽게 눈에 띌 정도로, 그는 분명 환영받는 샛별이다. 앞서 촬영해 둔 작품들임에도, 변요한이 인기를 얻자 차기작 영화 '소셜포비아'와 '마돈나'(연출 신수원)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인터뷰 중 새삼 흥미로웠던 것은 높아진 인기가 대화의 화제로 떠올랐을 때 변요한의 태도였다. 공공장소에서 부쩍 달라진 시선을 체감하냐는 질문에 답할 때나 가족들의 반응에 대해 말할 때, 그는 꼭 '인기'라는 단어 앞에 '드라마의'라는 관형어를 붙였다. 자연히 그의 모든 답변은 변요한의 인기가 아닌, '미생'의 인기로 흘러갔다. 몇 차례의 만남으로 그가 빈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심 어린 겸손이었다.
"사실 '미생'을 너무 많이 사랑해 주셔서 아직도 아쉬움과 그리움이 남아있어요. 연기를 반대하셨던 아버지께서도 이번엔 '드라마가 잘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5년 간 독립영화를 찍으면서 니가 많이 다쳤을텐데 이번엔 즐기더라. 그런 모습이 좋았다'고 말해주셨죠. '축하한다'고, '초심을 잃지 말라'고도 하셨고요. 사실 드라마 작업을 해보지 않아 편견이 있었어요. 하지만 좋은 작품이고, 제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미생'의 배우들 같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고요."
올해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된 변요한은 30대의 중후반이 됐을 때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스스로를 담금질하곤 한다. 지난 인터뷰에서 "소통을 잘 하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그는 이날도 "아마 그 때(3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됐을 땐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배우가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고 답했다.
"'미생'을 통해 함께 연기했던 이경영·이성민·손종학 선배님들은 제가 꿈꾸는 제 미래의 모습,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셨어요. 지나치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기운, 후배들과 하나 하나 눈높이를 맞추며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던 모습이요.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저를 건져주셨죠. 많이들 하는 말이지만, 그런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변요한이 생각하는 '최선'이란 단어에는 많은 다짐이 함축돼있다. "열정과 노력, 땀, 겸손을 잃지 않는 것, 치열함… 최선이란 말에 도달하기까지 그렇게 살고 싶다"는 그는 "쳐낼 것을 쳐내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며,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대한민국에서 필요한 배우'라는 말을 듣지 않겠나. 잘 살아야겠다"고 답했다.
"다음 인터뷰 땐 베드신에 도전할 수도, 퇴폐적인 인물을 연기할 수도 있다. 살인마로 변신할 수도, 로맨틱코미디에 출연할 수도 있다"고 예고한 변요한은 "그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두 눈을 찡긋거리며 답을 마치는 그에게선 아직 떨치지 못한 한석율의 기운이 풍겨났다. 하지만 지난 가을의 인터뷰를 떠올릴 때 그 빛깔은 확연히 옅어졌다. 이제 변요한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줄 준비가 됐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사진 박세완기자 park90900@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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