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기자] 모두가 '땜빵 선발'로만 여겼다. 갑작스런 사정으로 예정보다 일찍 얻은 기회. 그러나 '아직 멀었다'던 투수는 모두를 비웃으며 깜짝 호투를 펼쳤다.
3일 잠실구장의 스타는 단연 고원준(26)이었다. 예정된 선발투수의 몸상태 이상으로 경기 시작 수시간을 앞두고 급히 등판을 지시받았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일요일(5일 잠실 SK전) 장원준 대신 선발로 기용할 생각이었지만 갑작스런 상황 변화로 오늘 급히 내세우게 됐다"고 했다.
그는 "오늘 최대한 많이 던져주면 좋지"라면서도 "80∼90개 정도만 소화해줘도 충분하지 않겠느냐"며 미소를 지었다. 투구 내용보다는 최대한 이닝을 끌어주면 만족한다는 의미였다.
경기가 시작되자 고원준은 그보다 적은 공 76개를 던지고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며 그를 탓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 듯하다. 지난달 31일 노경은과 맞트레이드로 두산으로 이적한 뒤 4일 만의 등판. 두산 관계자들과 팬들의 입이 벌어질 정도로 호투를 펼쳤다.
말 그대로 흠잡을 데 없는 피칭이었다. 인터벌은 짧았고, 공은 시원시원하게 스트라이크존 외곽을 향했다. 주저하며 도망가다 제풀에 무너지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상대인 SK 타선이 최근 다소 소강상태에 빠졌다지만 속으로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이날 경기에 나선 듯했다.
사실상 투피치로 5이닝을 버텼다. 최고 142㎞의 직구 22개와 126∼135㎞의 슬라이더(29개) 두 종류로 승부했다. 커브(6개)와 체인지업(4개)은 곁들이는 정도였다. 구종은 단조로웠지만 스트라이크존 정면으로 가는 공은 거의 없었다. 공 하나하나 로케이션이 뛰어났고 무브먼트도 좋았다. 스타일은 다소 다르지만 마치 장원준이 한창 좋았을 때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초반부터 깔끔했다. 1회 박재상, 이명기, 최정을 내리 범타로 처리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선두 정의윤을 중전안타로 내보낸 2회에는 정의윤의 주루사에 삼진(최정), 3루수 땅볼(이재원)로 이닝을 끝냈다.
위기 탈출 능력도 과시했다. 볼넷과 안타로 몰린 3회 1사 1,2루에서 박재상을 2루수 땅볼로 유도, 4-6-3 병살타를 이끌어냈다. 4회를 이날 2번째 삼자범퇴로 끝낸 그는 5회 이날 유일한 실점을 기록했다.
박정권과 이재원을 내리 삼진처리한 뒤 사사구 두 개로 득점권 상황에 몰렸다. 투구수가 늘어나면서 힘이 빠진 듯했다. 2사 1,2루에서 김성현에게 중전안타를 맞아 2루주자 고메즈의 득점을 지켜봤다. 하지만 곧바로 마음을 다잡은 그는 박재상을 2루수 땅볼로 잡아내고 수비를 마쳤다.
고원준이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자 두산 덕아웃은 6회부터 윤명준을 투입하고 고원준을 불러들였다. 두산이 결국 4-1로 승리하면서 고원준은 두산 유니폼을 입은지 4일 만에 승리투수의 기쁨을 한껏 누렸다.
김 감독은 "고원준은 좌완 진야곱과 함께 셋업맨 정재훈 앞에 등판하는 중간계투(맙업맨)로 내세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도 선발로테이션에 공백이 생기면 고원준과 진야곱을 가장 우선 투입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산은 롯데와의 맞트레이드 당시 "선발과 불펜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투수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이제 첫 경기에 나섰을 뿐이지만 어쩌면 고원준은 두산의 또 다른 복덩이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연패를 2경기서 끊은 데다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귀한' 오른손 투수의 잠재력까지 확보한 두산으로선 무척 즐거운 '불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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