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준기자] 몸에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 반복된 연습으로 동작과 기술을 익힌 운동선수의 경우는 일반인과 견줘 더 그렇다.
변화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한국여자배구의 레프트의 한 축을 당당히 맡았던 GS칼텍스 한송이가 그렇다. 그는 지난 시즌부터 조금씩 변화를 시도했다. 너무나 익숙한 옷을 입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던 레프트 자리가 아닌, 다른 포지션에서 뛰는 횟수가 늘어났다.
한송이는 "라이트로도 뛰었고 센터로도 나왔다"고 했다. 2016-17시즌 NH농협 V리그가 개막한 이후 한송이는 센터로 뛰고 있다. 그는 "이제는 레프트가 아닌 센터 한송이로 불러달라"고 말하며 웃었다.
◆변화를 선택한 이유, 변화가 필요한 이유
한송이는 지난달 29일 팀 숙소와 체육관이 있는 경기도 용인시 강남대학교에서 '조이뉴스24'와 만나 오프시즌을 되돌아보며 "정말 힘든 여름을 보냈다"고 했다. "배구를 시작한 뒤 이렇게까지 운동을 많이 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센터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 우선 익숙했던 습관부터 버려야 했다. 레프트로 뛸 때 밟는 스텝이나 스파이크 스윙도 바꿔야 했다. 그도 처음에는 포지션 변경에 대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선구 GS 칼텍스 감독으로부터 센터로 포지션 이동 제안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한송이는 "솔직히 그 당시에는 정말 센터로 뛰기가 싫었다. '아직 레프트에서 충분히 공격을 할 수 있고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팀 상황도 한송이가 포지션을 바꾸게끔 돌아갔다. 오프시즌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배유나가 팀을 떠나 도로공사로 이적했다. GS칼텍스는 센터 전력을 보강해야 했다. 이 감독은 한송이를 눈여겨봤다. 그는 신장 186cm로 웬만한 센터보다 컸다. 선수생활을 더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변화는 필요했다.
한송이도 이제는 받아들였다. 특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에 매달렸던 이유다. 그는 "전체 훈련 일정 중 반 이상을 센터 연습으로 채웠었다"고 돌아봤다.
센터로 코트에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성에 차지 않는다. 한송이는 "나 때문에 경기를 잘 풀어가지 못하고 패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자책했다.
◆내 몫, 내 자리를 찾는 과정에 만족은 없다
GS칼텍스는 올 시즌 센터진을 베테랑 한송이와 신인급 정다운으로 꾸렸다. 둘 다 센터 자리에서 구력을 쌓아온 것은 아니다. 백업 센터는 프로 6년차 최유정이 맡고 있다.
한송이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그는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송이가 센터로 뛰며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속공 시도를 위해 밟는 스텝과 타이밍이다.
이 감독은 "(한)송이는 팀 연습 때는 세터와 잘 맞아간다. 그런데 경기에서 자꾸 엇박자가 난다"고 걱정했다. 속공을 시도해야 할 때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센터진을 활용해 상대 블로킹을 견제하고 흔들어놓아야 하는데 아직은 이런 부분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나연, 정지윤 등 세터들도 경기를 치르는 동안 한송이를 비롯한 센터진 활용에 주저하는 이유다. 한송이는 "반 박자, 반 스텝을 먼저 밟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며 "지난 시즌보다 어색한 건 줄어들었지만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각오를 전했다.
예전과 견줘 득점과 공격점유율에서 팀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었지만 센터 한송이의 가치는 여전하다. GS칼텍스가 올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센터 쪽에서 역할과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등번호 12와 인연
한송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구선수의 길을 걸었다. 그보다 두 살 많은 친언니 한유미가 먼저 배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구공과 친해졌다.
그는 지난 2003년 한국도로공사에 입단하며 성인배구 코트에 데뷔했다. 실업시절 2년을 보낸 뒤 V리그 원년 멤버로 프로배구 출범을 함께했다. 도로공사, 흥국생명, GS칼텍스를 거치며 성인배구 15년차 시즌을 맞는다.
고교시절부터 그에게 익숙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등번호다. 한송이는 수원 한일전산여고(현 전산여고)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12'번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애착이 가거나 특별한 의미가 담긴 번호는 아니었다"며 "고등학교에 올라와 배구부에서 남아있는 배번을 고르는데 기억으로는 12번과 15번이 있었다"며 "그래서 12번을 선택했는데 신기하게도 이후 계속 그 번호를 사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도로공사에 입단했을 당시에도 12번이 비어있었다. 흥국생명과 GS칼텍스로 이적했을 때도 그랬다. 한송이는 "조그만 부분이지만 신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팀에 선발됐을 때도 자연스럽게 12번 유니폼은 그의 차지가 됐다.
한송이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각각 4, 8번을 달고 뛰었다. 이 두 숫자를 더하면 오랜 기간 사용한 12번이 된다. 한송이는 "괜한 억지같다"고 웃었다.
◆장신 레프트라는 꼬리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여자배구의 대들보는 김연경(페네르바체)이다. 한송이는 중고교 후배이기도한 김연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중고교 시절 김연경과 함께 뛰진 않았지만 그는 "(김)연경이가 잘 하는 선수라는 소문은 일찍부터 있었다"고 했다. 한송이는 "연경이는 정말 특별하다"며 "보통 선수생활을 하다보면 기량 면에서 업 다운이 있기 마련인데 연경이는 달랐다. V리그에 온 뒤 한 시즌을 보내면 연경이는 실력이 부쩍 늘었다. 브레이크가 걸릴 법한데도 매시즌 더 나은 기량과 실력을 보여줬다"고 칭찬했다.
김연경이 국내를 떠나 국제배구계에서도 대형 스타로 인정을 받는 부분은 장신 레프트라는 희소성과 장점 때문이다. 그런데 김연경 이전에는 한송이가 대표적인 장신 레프트 자원으로 꼽혔다. 지금은 실업 코트로 자리를 옮겨 뛰고 있지만 GS칼텍스에서 주포로 활약했던 김민지도 한송이와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송이는 "지금은 지난 일"이라며 "연경이는 아마도 선수 은퇴를 할 때까지 갖고 있는 기량이 크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정말 부러운 부분"이라고 웃었다.
한국여자배구도 '포스트 김연경'을 준비해야 한다. 한송이는 "현재 V리그에서 뛰고 있는 레프트 중에서도 뛰어난 후배들이 많다"며 "그래도 신장 등 체격조건을 놓고 본다면 박정아(IBK 기업은행)가 연경이의 뒤를 바로 이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쉬운 마음이 남았던 태극마크
박정아는 지난 여름 누구보다 힏든 시간을 보냈다. 그는 여자배구대표팀 소속으로 2016 리우올림픽에 참가했다. 김연경을 주축으로 한 대표팀은 40년 만에 올림픽 메달 획득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배구팬 뿐 아니라 국민들의 관심과 기대도 컸다.
여자배구대표팀은 8강에서 만난 네덜란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탈락했다. 박정아는 네덜란드전이 끝난 뒤 많은 비난을 받았다. 네덜란드와 경기에서 나온 실수 때문이다.
고질적인 리시브 불안이 비난과 지적의 주된 원인이 됐다. 박정아 이전 같은 자리에서 수많은 팬들로부터 원성을 들었던 이가 있다. 바로 한송이가 그랬다. 리시브가 늘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큰 경기에서 범한 몇 차례 실수는 그대로 낙인이 됐다.
한송이는 "올림픽이 끝난 뒤 한 번 (박)정아을 만나서 얘기도 해볼까 했다"며 "정말 당시 정아의 마음을 100%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나 또한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한송이는 "고민을 했었는데 내가 정아와 알긴 알아도 살갑고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괜히 나서기도 좀 그랬고 카카오톡과 문자 메시지로 '힘내라'고만 전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한송이는 "정아가 더 단단해졌으면 한다"며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 선수라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성장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한송이는 국제 배구계에서 '포스트 김연경'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주팅(중국)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도 대표팀 소속으로 주팅과 여러 번 경기를 치른 경험이 있다.
한송이는 "김연경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며 "워낙 착한데다가 연경이의 열성팬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그는 "중국은 장신화에 성공했고 빠르기와 세기까지 갖췄다. 예전 선배들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 아시아 3팀(한국, 일본, 중국)은 서로 10년 주기로 전성기를 주고 받는다고. 현재 일본은 하향세에 들어간 것 같고 한국과 중국이 전성기에 함께 들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송이는 자신에게 마지막 올림픽 무대가 될 수 있었던 리우대회가 그래서 더 아쉽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리우에 꼭 함께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안됐다. 후회나 미련은 이제 없지만 다음 대회인 2020 도쿄올림픽에서 연경이를 중심으로 대표팀이 반드시 좋은 성적을 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1984년생인 그도 이제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현역 선수 생활을 언제 그만둘 지 기한을 정한 건 아니다. 그는 "이효희, 정대영, 정지윤 언니 그리고 우리 (한)유미 언니까지 아직 코트에서 뛰고 있다. 그 언니들처럼 나도 할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웃었다.
FA 자격을 얻을 기회도 다시 한 번 찾아온다. 한송이는 올 시즌 종료 후 FA가 된다. 그는 "FA는 아직 시기상조"라며 "현재에 충실하고 집중하는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조이뉴스24 용인=류한준기자 hantaeng@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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