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여느 무뚝뚝한 소년들처럼 말수가 없던 아들이 어느날 웃음을 찾았다. 처음으로 집에 친구를 데려왔고, 그 아이와 형제처럼 일상을 나눴다. 아들의 조용하고 예의 바른 친구가 썩 마음에 들었다. 불우한 가정사는 안쓰럽게 느껴졌다. 작은 것이라도 챙겨주고 싶었다. 아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어른이 되어가는 소년을 기쁘게 지켜봤다.
그러나 대비하지 못한 때에 비밀이 찾아왔다. 아들과 친구의 관계는 단지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다. 두 청년은 함께 여행을 떠났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눈 앞에는 이들의 추억이 담긴 카메라가 놓였다. 아들이 생사를 오가고 있는 상황만으로도 혼란스러운데, 이제 아들의 비밀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곁에는 아들을 여전히 사랑하는, 한때 아들처럼 아꼈던 아들의 연인이 있다.
영화 '환절기'(감독 이동은, 제작 명필름랩)는 아들 수현(지윤호 분)과 아들의 친구 용준(이원근 분) 사이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 엄마 미경(배종옥 분), 세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동은, 정이용의 그래픽 노블 '환절기'를 원작으로 했다.
기존의 한국 퀴어영화가 성소수자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뤄왔다면, '환절기'의 시선은 특별하다. 영화는 의식을 잃은 동성애자 아들의 성정체성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의 시선을 담는다. 친구인 듯 연인의 관계를 이어 온 두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물론,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소원해진 둘의 모습을 응시하는 눈 역시 미경의 것이다.
이 덕에, '환절기'는 로맨스 영화로 손쉽게 규정될 수 없는 작품이다. 성소수자들의 연애가 영화의 주요 소재인 것은 맞지만, 이 관계의 관찰자이자 극의 화자가 이들 사이의 바깥에 있는 미경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정서가 개입된다. 그래서 두 연인의 이야기가 마치 액자식 구성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위기와 희망의 사이에 놓인 수현과 용준의 관계는 이들을 바라보는 미경의 시선 안에서 철저히 관조되는듯 보인다. 미경이라는 제3자의 눈은 관객으로 하여금 수현과 용준의 관계, 나아가 극의 엔딩을 쉽게 단정 짓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엔딩 이후 세 인물의 삶을 상상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이 영화가 관객 각자의 마음에 가 닿는 방법이다.
수현과 용준의 관계를 알게 된 미경, 미경의 혼란에 상처 받고도 끝내 미경과 수현의 곁을 지켜 온 용준은 수현이 깨어나기까지의 시간을 함께 나누며 숱한 감정을 교류한다. 미경과 용준의 관계란 오로지 수현을 매개로 한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수현은 영원토록 이 시간들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수현이 의식을 잃은 그 계절에 미경과 용준의 사이에서 이뤄지는 감정의 대류는 '환절기'라는 영화의 제목과도 조응한다.
미경과 용준의 관계는 '환절기' 속 세 명의 주요 인물들이 이루는 모든 관계쌍 중 가장 낯설게 다가온다. 모자 관계인 미경과 수현, 연인이었던 수현과 용준의 관계와 달리, 미경과 용준의 관계는 쉽게 언어화될 수 없다. 말해지지 않는 관계에 대한 불편함은 미경이 용준을 향해 느꼈던 감정과도 닮아있다. 이는 동성애에 접근하는 우리 사회의 미숙한 시선을 설명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를 지배하는 미경의 시선이 용준을 포용하면서, '환절기'는 퀴어 연인과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 영화로서 꽤 모범적 메시지를 선취하게 된다. 어떤 인물도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끝내 누구도 스스로를 버리지 않게 만드는 결정에선 인물과 세계를 향한 애정이 묻어난다.
여성 주연 영화를 만나기 쉽지 않은 충무로에서 오랜만에 영화 작업의 주연을 맡은 배종옥은 특유의 절제된 연기로 영화의 흐름을 이끈다. 위기를 맞은 남편과의 관계, 식물인간이 된 아들, 마음 둘 곳 없는 아들의 연인까지, 미경 역은 영화의 모든 인물들과 내밀히 교류해야 하는 인물이다. 배종옥의 미경을 따라가는 일은 '환절기'가 그리는 공기의 변화를 가장 자연스럽게 포착해내는 길이다.
청춘스타로 떠오른 이원근은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철 없고 발랄한 인물들보다 '환절기' 속 용준처럼 고독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의 캐릭터를 더욱 제 것처럼 소화한다. 신선한 에너지의 신예 지윤호는 계절의 흐름에 비유되는 세 인물 간 관계의 변화를 수현 역을 통해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동은 감독은 데뷔작 '환절기'로 지난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KNN관객상을 수상한 것에 이어 1년 만에 신작 '당신의 부탁'으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성과를 거뒀다. '당신의 부탁' 역시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두 편의 영화를 통해 감독은 올해 봄 극장가를 누구보다 바쁘게 누빌 전망이다.
'환절기'는 지난 22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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