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박진영 기자] '날 것'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끝나지 않는 비극 속 웃음기를 지워낸 이들이 숨을 헐떡인다. 그저 '남들과 비슷하게' 평범한 삶을 꿈꿨을 뿐인데,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과연 이들에게 '화란'은 존재하는 걸까. 지독하게 서늘하고 쓰라린 '화란'이다.
'화란'(감독 김창훈)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년 연규(홍사빈)가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송중기)을 만나 위태로운 세계에 함께 하게 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누아르 영화다. 송중기가 작품의 힘에 매료되어 '노 개런티' 출연을 역으로 제안해 화제를 모았으며, 신예 홍사빈과 김형서(비비)가 출연해 탄탄한 앙상블을 완성했다. 여기에 제76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의 영화를 소개하는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대받아 기대를 얻었다.
영화 속 연규와 치건이 겪은 모든 비극은 가정폭력에서 시작됐다. 고등학생인 연규는 동생 하얀(김형서 분)의 일에 분개해 폭력을 쓰고, 이 때문에 합의금 300만 원이 필요하게 됐다.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중국집 사장은 손님 짜장면에 침을 뱉는 등 저급한 행동을 일삼는다. 어머니와 재혼한 새아버지는 툭하면 술을 마시고 연규를 때린다. 딸인 하얀이 옆에 있을 때는 그나마 덜 때린다는 새아버지를 마주할 때마다 연규는 온몸을 벌벌 떤다. 이런 연규가 바라는 건, 돈을 모아 어머니와 네덜란드 즉 화란으로 떠나는 것이다. 무언갈 하고 싶어서, 특별한 꿈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누구나 비슷하게 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치건이 연규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닮은 연규에게 치건은 300만 원을 건네고, 연규는 이끌리듯 치건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치건은 연규에게 처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어른'이다. 하지만 치건 역시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기를 잃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송중기는 이런 치건의 선택과 행동을 '비겁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만큼 '화란'은 시종일관 누아르 특유의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넘어 눅눅하고 찐득하다. 빛이라곤 전혀 없는 인물들에겐 숨이 턱턱 막히는 지옥 같은 현실이 존재한다. 특히 가정폭력에 허덕이다 나중엔 돈을 벌기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연규의 안타까운 몸부림은 지독하게 처절하고 쓰라리다. 마치 낚시찌에 걸려 파닥이는 물고기처럼,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의 연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치건의 선택은 앞으로 계속 살아나가야 하는 연규에게 또 하나의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이 되지 않았을까. 화란을 찾고 있지만 결국 영어 제목인 '희망 없는'(Hopeless)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가슴 시린 '화란'이다.
'화란'이 가진 누아르 색깔을 완성한 건 역시나 배우들의 호연이다. 웃음기를 완전히 지워낸 송중기는 어둡고 지친 얼굴로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강렬한 캐릭터를 보여준다. 전도연, 김남길 주연의 '무뢰한'을 굉장히 좋아하고, 누아르 영화 출연을 간절히 원했다는 송중기는 이번 '화란'을 통해 가슴 깊이 품고 있었던 배우로서의 한을 어느 정도는 풀어냈다. 그간 '밀크남', '잘생김'의 대명사였던 송중기가 이런 얼굴도 보여줄 수 있구나, 새삼 놀라게 된다. 더 깊어진 연기력과 등장할 때마다 시선을 사로잡는 존재감은 '화란'을 더욱 묵직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송중기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홍사빈의 열연도 주목할 부분이다. 아직은 보호받아야 할 어린 존재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두려움을 삼키고 더 센 척하는 연규를 섬세하게 연기해내 호평을 이끌었다. 김형서는 연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동시에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소리 지를 줄 아는 여고생 하안으로 변신해 극 속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무대 위 다채로운 매력을 뽐내던 가수 비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얀에 완벽히 몰입한 김형서다. '화란'을 시작으로 앞으로 보여줄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더욱 기대되는 두 사람이다.
10월 11일 개봉. 러닝타임 124분. 15세 이상 관람가.
/박진영 기자(neat2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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